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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깔린 가운데 입주가 막 시작된 어수선한 아파트촌 담벼락에는 오징어잡이 배 조명 같은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빛에 이끌려 삼삼오오 발길을 옮긴 사람들은 어린 시절 풍경과 농촌의 들녘, 바닷가와 마주하고는 잠시 상념에 잠긴다.
지난 11일 밤 서울 공덕동 아파트촌 풍경이다. 효성 본사 뒤편에서 공덕삼성아파트 사잇길로 쭉 늘어선 그림들은 형광 불빛 아래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 그림을 한점 한점 구경하며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작은 의자에 앉아 캔버스에 붓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아저씨 한분을 만나게 된다. 그의 붓질 하나에 시골길에는 코스모스가 피고, 나무가 바람에 나부낀다. 그림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탄성을 연발했다.
60년대 말부터 붓을 잡았다는 최청락(57) 화백. 그는 그림은 전시회에 가서 고상하게 감상하는 것이라는 일반인의 편견을 깨고자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거리의 미술가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의 문화 풍토는 너무 삭막하다. 40호짜리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것이 전문인 그는 한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가질 만큼 실력을 인정 받았다. 최근까지 삼각지 역 근처에서 화랑도 운영했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 싶었다.
해외 바이어를 통해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도 그림을 수출했던 그였다. 각 나라마다 원하는 색감이 다르다는 그는 미국 북부 지방은 묵직한 색을, 남부 지방은 밝은 색을 선호한다는 설명에서 전문성이 배어났다.
하지만 그는 중국의 저가공세에 그림 시장마저도 위축되면서 수입이 점차 줄었다고 한다. 그러던 8년 전 우연히 작품을 가지고 거리에 나섰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후 세월만큼 오래된 봉고차를 이끌고 전국을 오가며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청량제 같은 그림을 선사하게 되었다. 직접 사지는 못하더라도 지나가며 눈맛 한번 느낀 사람들이 짓는 미소가 그에게는 참으로 값지다고 했다.
최 화백이 그림 그리던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한 부부는 연신 흐뭇해 하다가 작은 작품 하나를 사갔다. 동네 할머니들도 나와서 그림을 보며 가을 곡식 거두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이런 자신을 '얼치기' 취급하며 목에 힘주고 다니는 미술가들이 많이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전업작가는 50% 정도 감소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교편을 잡고, 권위에 안주해 정작 각 가정에는 미술품 하나 제대로 걸린 집이 없는 현실을 낳았다는 것이다.
최 화백은 인터뷰 도중에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길은 느린 듯 했지만, 어느새 정겨운 우리네 시골길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