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수도로 번영을 누리던 쓰저우와 월나라의 수도 항저우, 오나라와 월나라는 역사상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대단한 라이벌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두 나라의 은원관계는 세대와 세대를 초월할 만큼 그 뿌리가 크고 깊었다.
특히 지루한 이 싸움의 최종 승리자인 월나라의 항저우와 달리 오나라의 수도였던 쓰저우에서는 그네들의 깊고 깊은 은원관계의 허망함을 더욱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그네들의 은원관계가 얽혀 있는 대표적인 유적, 호구(虎丘)로 가는 중이다. 호구는 한마디로 오나라 왕 합려의 무덤이다.
오왕 합려의 무덤 호구
오나라왕 합려는 일찍이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왕위가 생각지도 않던 사촌동생에게로 가자 심복중의 심복인 오자서와 공모하여 사촌동생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람인 만큼 정복욕 또한 남달랐다. 군사력 증강을 위해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를 초빙하여 춘추시대 제일 국가를 꿈꿀 정도로 세력이 커졌지만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뜻하지 않게 사망함으로써 천하패권을 꿈꾸던 그의 꿈은 미완성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부차는 월나라와의 전쟁 중 사망한 부친의 한을 달래고자 전쟁 준비에 준비를 거듭한 끝에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선왕의 원수인 월왕 구천을 사로잡기까지 했다. 그런데 공신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국지색 미녀 서시에 반해 그만 부친의 원수인 월왕 구천을 풀어주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세월은 흐르고 그 때 그 패전의 쓰라림을 잊지 않기 위해 와신상담했던 월나라 왕 구천은 복수를 위해 다시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 당시 오나라왕 부차는 몇 차례 전쟁을 이긴 후 자만심에 빠져있는 데다 여인 서시에 미쳐서 국정을 거의 살피지 않고 있었다.
이에 충신 오자서는 거듭 거듭 경고했지만 도리어 오자서를 의심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칼을 주어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비분에 찬 어조로 부하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내 눈을 도려내어 수도 고소성(姑蘇城: 지금의 쓰저우) 동문에 걸어두라!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는 꼴을 똑똑히 봐 주겠다"고 말한 후 자결했다.
결국 월나라의 공격에 크게 패한 부차는 사면초가 상태에서 오자서의 한이 섞인 마지막 유언과 그동안의 충심 어린 말들을 떠올리며 "오자서를 만날 낯이 없구나!"라고 깊은 회한을 남긴 채 자살로 생을 마쳤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세대를 초월한 지루한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물론 역사는 철저하게 승자의 역사이지만 때로는 이곳 호구와 같은 패자의 유적을 남겨놓음으로써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역사의 허무함을 준엄하게 깨우쳐주고 있었다.
호구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아담한 수로가 축조되어 있었다. 수로 위에 떠있는 배와 그 옆에 서 있는 검은 색 기와를 얹은 수상가옥의 색다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배를 타고 이 수로 위를 지나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지나가면 왠지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생길 것만 같았다.
오나라 왕 합려, 그처럼 야심만만한 사람이 채 꿈을 피우지 못한 채 서럽게 묻혀 있는 곳, 호구의 정문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감감천이라 씌어진 조그만 우물이 하나 있다. 일설에는 눈 먼 동자승이 현몽으로 우물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을 파서 나온 물로 눈을 닦으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하는 영험 있는 샘물이다. 감감천을 지나 맞은편에 보이는 열녀비 성격의 고진양묘라는 아담한 비각을 지나니 시검석과 호구검지가 나타난다.
시검석과 호구검지
오왕 합려는 평소에 보검 욕심이 많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칼을 찾을 수 없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라이벌이었던 이웃 월나라에는 천하의 명검을 만들기로 유명한 구야자(歐冶子)가 살고 있었기에 더 더욱 합려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그러던 중 쓰저우 성내에 간장(干將)이라고 하는 대장장이가 합려를 찾아와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보검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합려는 100일 안에 가장 좋은 보검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간장은 100일 내에 혼신의 힘을 다해 당대 최고의 보검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보검을 합려에게 바치면 이런 보검이 또 다시 만들어질 것을 두려워한 합려가 분명 자신을 죽일 것이라 짐작했다. 간장은 또 다른 검을 만들어 앞의 검은 간장검이라고 하고 후에 만든 검은 막야검이라 명명한 후 마침 임신을 하고 있던 부인에게 간장검을 주어 피신시키는 대신 합려에게는 간장검이 아닌 막야검을 바쳤다.
그때 마침 호구를 걷고 있던 합려는 기뻐하면서 그 칼로 옆에 있는 큰 돌을 치니, 돌은 두 쪽이 났고 보검은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전무결하였다. 만족한 오왕은 간장의 추측대로 이와 같은 훌륭한 보검이 또 다시 세상에 만들어질 수 없도록 간장의 살해를 지시했다.
남보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간장이 비명횡사한 지 18년이 지난 어느 날, 합려는 복수를 위해 간장검을 차고 온 간장의 아들이 휘두른 간장검에 의해 죽고 간장검과 막야검은 청룡과 적룡으로 변해 청년은 청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이 떠돈다. 그곳이 바로 시검석이라는 갈라진 돌의 유래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사실은 이처럼 또 다른 전설 속의 장소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데 더욱 우스운 것은 호구검지의 존재였다. 후에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합려의 시신과 함께 이곳에 묻혀 있다는 삼천 개의 보검들이 탐나 이곳을 파헤치려고 했는데 파헤치는 동안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 도굴작업은 중단되었고 그 중단된 자리에 물이 나와 연못이 되었다고 하는 곳이다.
실제로 빨간색으로 커다랗게 호구검지라 쓰인 곳에는 정말 아담한 연못이 있어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전설인지 구별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3000개의 보검이 탐나 남의 무덤을 도굴했던 진시황 또한 정작 자신의 무덤이 발굴이란 명목으로 파헤쳐져 무덤 속을 지키던 병마용이 전 세계 각국으로 떠돌아다니며 달러를 벌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고 보면 역사는 수도 없이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호구의 정상이 보인다. 호구 정상에는 동방의 피사의 사탑이라 불리는 호구의 사탑이 비스듬하게 서 있다. 탑의 높이는 47.3m, 모두 7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면 8각형의 모습의 벽돌로 만들어진 이 탑은 쓰저우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어서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이 어머니를 위해 세웠다는 북사탑과 함께 쓰저우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호구의 사탑 또한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합려의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아 합려의 무덤에 이마가 하얀 호랑이가 나타났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다. 오왕 부차는 무슨 징조인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한 신하가 대답하기를,
"호랑이는 산중의 왕이므로, 천하를 제패한다는 길조입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얼마 있지 않아서 사라졌으니, 이것이 걱정됩니다." 오왕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신하는 "호구가 원래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꼬리모양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꼬리 모양의 탑을 만들면 좋은 일이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오왕이 탑의 건설을 지시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가 월나라 구천에 의해 함락된 이래 이 곳 쓰저우는 특히 역사 속 승자보다는 패자의 역사가 자랑스럽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경극 <패왕별희> 속 비극적인 영웅 항우가 대부분이 쓰저우 출신이라는 강동의 8000 병사들과 진나라에 반발하고 초나라 재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출발을 시작한 곳도 이곳이요, 위·촉·오 세 나라가 솥발같이 일어났던 삼국시대 오의 손권의 부친 손견의 고향도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곳 쓰저우는 관광객들로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왠지 모르게 조용하고 잔잔한 서글픔이 느껴진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휩쓸고도 남았지
형세 불리하니 오추마조차 나아가질 않네
오추마 같은 것이야 어찌해 본다지만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 할거나?
마치 마지막으로 우미인을 부르는 패자가 된 항우의 마지막 가슴 아픈 노래처럼 쓰저우는 멀리서 이곳을 찾아온 여행객의 가슴 속에, 역사 속에서 점점 멀어져간 패자들의 가슴 떨리는 슬픔과 애잔한 사연을 담은 조용한 이야기들을 끝도 모르는 실타래마냥 술술 풀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