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작가들은 캔버스를 버린 지 오래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폐품과 쓰레기다. 그렇다면 인류역사의 정수인 '현대문명과 예술'의 동의어는 '쓰레기'가 아닌지 곱씹어 보게 한다.
동물들은 식사 뒤에 고작 똥 한 덩어리를 남기는데 사람들은 무지막지하게 만들어내 소비하고 먹어댄 다음 쓰레기로 거대한 산을 쌓는다. 쓰레기는 그래서 욕망의 동의어가 되고 만다. 그것들이 넘쳐흘러 들어와 비엔날레를 가득 채우고 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작품 <광주천의 숨소리>는 고철로 만든 거대한 붕어 뱃속에 광주천에서 걷어 올린 쓰레기들을 넘치도록 담아 놓았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라지만 이토록 코를 자극하는 악취를 맡게 하다니 고약한 예술이다.
그런데 맞다. 그것이 죽음의 냄새이니 지독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뭇 생명들의 보금자리였던 곳을 짓밟았으니 우리는 죽음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꼴이다. 이 작품은 천성산과 도롱뇽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단식을 했던 '지율스님'이 참여관객으로 힘을 모았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독특하게 '참여관객제'를 통해 작가와 관객이 함께 작품을 만들도록 했는데 그 깡마른 스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로 걸어갈 것을 촉구하며 바랑 가득 쓰레기를 짊어다가 부려 놓은 셈이다.
도시는 마약과 같은 존재다. 고통스럽고 외롭다고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소외 받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모두 모두 도시로 몰려 왔는데 이 휑한 공기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진정한 나의 소유는 없는데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 산다. 도시를 만들고,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거대한 매트릭스 속에 갇혀 있다. 예술가들은 연약하지만 정교한 더듬이로 출구를 찾는다. 도시를 해체한다. 폭력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계를 해부해 보인다.
<악마는 결코 쉬지 않는다>라는 작품은 전시 시간 내내 총을 쏘아대고 미술관의 벽을 폭파한다. 무얼까? 그들은 불온하게도 불평등한 세계를 전복하고 싶은 게다. 전복되지 않은 세계가 있었던가?
'새만금과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낳은 '부안 사람들'은 문규현 신부와 함께 생명, 평화의 길로 함께 가자며 자신들의 신발을 길게 늘어놓은 <기원>이란 작품을 내놓았다. 그 신발들이 놓인 길을 따라가면 어쩐지 밝고 환한 땅이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전해온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정은미용실>을 찾아가면 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머리손질을 공짜로 받아 보는 재미가 있어서다. 공짜 좋아하는 생물의 본능에 순응하여 행복해진다고 부끄러울 일은 없다. 이 작품은 '이정은'이라는 고등학생 참여관객의 어머니가 미용실을 하고 있는 것이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장소가 전시장일 뿐 실제 상황이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 ... 행렬 달빛소나타>로 가서 수북이 쌓인 뻥튀기를 먹으면 된다. 역시 공짜! 대통령도 개막식에 들렀다가 뻥튀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높은 예술적 안목이나 깊은 철학적 해석이 없이도 비엔날레는 보고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나중에는 사진으로 전시한다고 하는데 제목 그대로 모두 사라지고마는 얼음조각 작품이니 녹는 과정을 찍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괜히 어설프게 사진으로 보여 주느니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 게 나을 성 싶다. 원래부터 있던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대상을 받은 <가장 가까운 공기>도 '공기'나 '공간'을 보여줘야 하는데 뵈는 게 없다 보니 털실 몇 가닥을 바람에 흔들리게 걸어 놓았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전시작품을 엮어 놓은 도록에도, 찍을 수 없으니 사진을 싣지 못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를 보는 듯, 왠지 사기당한 기분인데도 기발하고 엉뚱한 발상들이 즐겁다.
올해 개통한 '광주지하철'도 전시공간으로 한몫을 하고 있는데 각 역사의 통로며 전동차 내부, 화장실에까지 전시작들이 자리잡고 있다. 일찍이 화장실에서 그토록 황홀한 기분으로 용무를 본 적은 없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광주지하철 안에 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달팽이를 타고 직접 가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