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후세 다쓰지 변호사
후세 다쓰지 변호사
정부는 12일 일제 때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고 항일운동을 지원한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79~1953) 변호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항일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로 중국인 등 외국인이 더러 건국훈장을 받은 사례는 있지만 일본인이 건국훈장을 받기는 처음입니다.

후세 변호사는 1919년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 송계백 선생 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론을 비롯해, 1924년에는 의열단원으로 도쿄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참석한 일본 총리와 조선 총독을 폭살하기 위해 일본 왕궁의 이중교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를 변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1926년 일왕과 왕족을 폭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체포된 박열 선생 등의 변론을 맡아 무죄를 주장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항거를 적극 옹호했다.

그러나 후세 변호사에 대해서는 3차에 걸친 공적심사에서 큰 이견은 없었으나 그간 포상이 보류돼 왔습니다. 이유는 외무부가 포상을 반대한 까닭입니다. 이유는 일본 정부의 지도자들이 걸핏하면 망언을 일삼는데 자칫 후세 변호사에 대한 정부 포상이 이들에게 악용되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정부의 포상 결정이 바람직했다고 봅니다. 설사 그런 우려가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후세 변호사의 공적이 묻혀선 안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흔히 일제 때의 일본인이라고 하면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후세 변호사처럼 우리를 도운 일본인 법조인이 있었다는 게 놀랍고 또 고맙지 않습니까?

후안 콜 교수
후안 콜 교수
두 번째는 미 미시간대 후안 콜 교수의 ‘만약 미국이 이라크라면’이라는 글을 보도한 기사입니다. 13일 <동아닷컴>과 <오마이뉴스> 등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이 글은 콜 교수가 이라크의 현재 상황을 미국에 빗대 지난 9월22일 콜 교수가 인터넷에 게재한 것인데 이후 해외로 퍼져나가 현재 사이버공간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1주일간 워싱턴 뉴욕 등 대도시에서 자동차 폭발, 로켓탄, 자동소총, 공중폭격에 의해 3300명이 숨지는 일이 계속된다면?”
“중무장한 27만5000명의 게릴라가 시애틀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를 점령했다면?”
“민병대를 소탕한다며 알링턴 국립묘지를 미군 전폭기가 매일 폭격해 묘 수천 기가 파괴되고 베트남전 참전용사비가 박살난다면?”

여기서 ‘3300명’이라는 수치는 지난 9월 셋째 주에 미군에 의해 숨진 이라크인 300명을, 또 27만 5000명은 이라크 무장세력 2만 5000명을 11배로 확장한 수치랍니다. 기 이유는 미국이 이라크보다 인구가 11배나 많아 이를 환산한 수치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이처럼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실지로 콜 교수가 가정한 이런 사태가 미국 본토에서 발생했다면 미국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요? 모르긴 해도 이라크를 테러국가로 다시 지정해 응징한다고 난리법석을 떨겠지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글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다시 일본판으로 개작돼 널리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식이랍니다.

“도쿄의 황궁, 국회의사당 등이 매일 로켓포 공격을 받는다면? 1주일간 1500명의 일본인이 대도시에서 기관총과 수류탄 공격으로 숨졌다면? 미군 전폭기가 테러리스트를 잡는다며 매일 밤 폭격해 노약자들이 죽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일본 침략은 정당했다. 일본 상황은 개선되고 있으며 일본인들은 민주화 진전에 기뻐하고 있다’고 한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사진은 <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 표지
야나기 무네요시. 사진은 <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 표지
바로 이 대목을 접하자 돌연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올랐습니다. 야나기는 해군 소장의 아들로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유명한 민예(民藝)학자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조선인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의 ‘조선 사랑’은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을 헐려고 하자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조선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내에 청사 건립을 추진하면서 광화문을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습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옮기는 자체는 이미 왕궁을 짓밟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국내의 조선, 동아일보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총독부를 두려워한 탓이었겟지요.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강한 문제제기가 터져나왔습니다. 일본인 야나기가 이 소식을 듣고는 당시 일본의 대표적 민예잡지 <개조(改造)>(1922년 9월호)에 ‘없애버리려고 하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총독부를 강하게 질타하고 나섰습니다.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이 한 편의 글을 공개할 시기가 나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행해지려고 하는 동양 고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하여 나는 지금 가슴이 쥐어짜지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조선의 주부(主府) 경성(京城, 일제 당시의 서울 이름)에 잇는 경복궁을 방문한 적이 없는 분들에게는 그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을 부숴버리는 일에 대해 아마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 지도 모른다....그러나 아직도 이 제목이 독자들에게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부디 다음과 같이 상상해 주기 바란다.

가령 지금 조선이 발흥(勃興)하고 (반대로)일본이 쇠퇴하여 마침내 (일본이)조선에 병합되고 궁성이 폐허가 되고 대신 그 자리에 대규모 서양식 일본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저 푸른 해자(堀)를 넘어 멀리 바라볼 수 있었던 흰 벽의 강호성(江戶城)이 파괴되는 광경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 아니 이미 부숴져 가는 망치소리가 가까웠다고 강하게 상상해 주기 바란다. 나는 저 강호시대를 기념할 일본 고유의 건축물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렸구나. 네가 지난날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속으로 묻히려 하고 있다. (이를)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겠구나. 비정한 끌(鑿)과 무정한 망치(鎚)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말이 멀지 않았다.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아파할 사람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너를 구할 수는 없다. 불행하게도 너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의 일을 슬프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얼마 안가서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러나 빼앗겨서는 안될 존재를 위하여 나는 아 글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진하고 선명한 묵으로 쓰고 또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상의 시야에서 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지라도 나의 이 글은 적어도 지상의 어느 곳엔가에는 전파될 것이다. 나는 뿌리깊게 너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추도문을 대중앞에 보내는 것이다.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친구여!....

경복궁을 잃는다는 것은 한성(漢城, 서울의 옛 지명)의 중심을 잃는 것과 같다. 저 왕궁보다도 정확한 형식과 위대한 규모를 지닌 것은 조선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조선건축의 대표이며, 규범이며 정신이 아닌가. 정치는 예술에 대해서까지 무분별해서는 안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권력의 행사는 삼가라. 자진해서 예술을 옹호해주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 해야할 일이 아닌가. 우방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도시를 위하여, 더욱이 그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하고 세우라...."(후략)


아무리 예술에 미쳤기로서니 일본과 조선의 입장이 서로 바뀐 경우를 가정해가면서까지 이같은 글을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야나기의 글이 발표되자 일본은 물론 조선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사이토 총독은 이 글을 보고 유(柳)라는 성을 가진 그가 필시 조선인일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해 신원조사를 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세등등했던 총독부도 결국 광화문을 헐지는 못하고 건춘문(광화문 동문) 곁으로 이축(移築)했습니다. 현 광화문은 6.25 때 상단부 목재는 모두 타고 기단만 남은 것을 지난 1968년 현 자리로 옮겨와 새로 지은 것입니다.

그해 11월 정부는 광화문 준공기념식을 하면서 이 타국의 ‘은인’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야나기는 이미 7년전에 타계해 그의 부인이 대신 참석했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성악가로 생전에 식민지시절 조선에서 20여 차례에 걸쳐 독창회를 갖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수익금 전액을 조선의 사회사업에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사후 23년이 지난 뒤인 1984년 9월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부부에 대한 우리의 작은 보답이었겟죠.

어제 문득 후세 변호사의 건국훈장 추서 소식과 콜 교수의 “만약 미국이 이라크라면”이라는 글을 보고 갑자기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올라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일본인으로서 드물게 한국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고 한국과 일본의 입장을 '역지사지'한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