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운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98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제자입니다. TV나 신문 등을 통해 요즘 선생님을 자주 뵙습니다. 10년 전에 비해 관록이 느껴지지만 그다지 세월의 때가 느껴지지는 않는 선생님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교수실 한번 찾아 간 적 없고 대학원도 가지 않았으니 저를 기억하실리 만무하겠지요. 선생님께 거시경제학과 화폐금융론을 수강했지만 수업엔 별로 관심이 없고 경제학 바깥으로 자꾸 눈을 돌렸기에 더더욱 기억에 남으실리 없으시겠죠.

그 탓으로 여전히 거시경제학이나 화폐금융론에 대해서는 경제학 전공자라고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처지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수업 시간에 들은 강의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단지 선생님이 가끔식 말씀하시던 한국 금융산업의 낙후성과 그로 인한 경제 위기 가능성이 기억날 뿐입니다. 경제가 호황기를 구가하던 당시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선생님의 경고는 97년 말 현실이 되었고, 이후 정운찬이라는 이름은 경제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서울대 총장에 취임하셨지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수업에서 기억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논리적 냉철함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개인적 경험과 같은 단편적 지식을 바탕으로 함부로 전체 경제를 재단하는 오류를 저지르지 말라고 강조하셨죠. 특히 나라 전체의 경제를 조망하는 거시경제학에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교입시 부활이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그런데 요즘 선생님께서 매스컴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혼란이 생깁니다. 분명히 당시 가르침과 모순되는 말씀을 하시고 계시거든요.

선생님의 지론인 "고교입시 부활"은 이미 알려진 대로 선생님의 개인적 경험에 상당 부분 기인합니다. 수업 중에도 종종 밝히셨듯이 선생님은 어렵게 공부해서 명문고에 들어갔고, 고등학교에서도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었지요. 대학 졸업 후에도 유학갈 엄두도 못 내서 한국은행을 다니다가 직장에서 유학 준비해서 뒤늦게 학자로 성공하셨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평준화 체제 내에서는 결코 가난한 집 자녀가 명문대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비평준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개인적 경험을 과도하게 일반화하는 것 아닌가요? 과문합니다만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개인사로 인해 얻어진 신념은 흡사 신앙과도 같아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평생 쌓은 학문적 원칙과는 너무나 어긋난 주장을 하시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제학에서 강조하듯이 엄정한 논리에 기반해 고교입시제도가 어떠한 효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전에 그러했듯이 (거의 100%의 가능성으로 강남에 소재할) 몇몇 명문고가 지금의 명문대학처럼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입학이 가능해질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지금 평준화제도와 무엇이 달라질까요?

먼저, 학군이 없어지니 전국에서 이 명문고들로 지원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명문대는 대부분 명문고 출신으로 채워질 겁니다. 다시 말하면, 명문대를 명문고가 대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인적인 입시제도가 고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예전에 그랬듯이 그 입시 강도는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겁니다.

논리적으로 판단할 때, 그 외에 바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고교 입시 부활이 선생님이 주장하는 "가난한 집 학생의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국으로 모집 단위를 확대한다고 해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우수한 학원과 좋은 교육 환경, 열성적인 부모를 가진 강남 지역 중학생들이 강남 명문고로 모여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교 입시 부활은 대안이 아니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선생님이나 입시처장인 김완진 선생님이 주장하듯이 지역별 학력차가 엄존한다면, 고교 입시 부활은 결코 선생님의 주장처럼 명문고교 학생들의 다양성을 담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개천에서 용날 기회"는 오히려 더 줄어든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겁니다. 지금은 어떻게라도 강남에 방 한칸 전세살이 비용만 마련할 수 있다면, 아니 강남에 우리 아이 받아줄 방 한 칸 있는 친척만 있다면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겠지만, 고교 입시부터 엄청난 사교육이 동원된다면 지방에서는 아예 꿈조차 꿀 수 없게 되겠지요.

그리고, 지방 출신의 몇몇 우수한 학생이 명문고에 겨우 진입한다고 해도 이미 초등학교부터 한 학교를 다녔고 부모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해 온 강남 출신 학생들의 배타적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선생님이 명문고를 나오던 시절처럼 팔도에서 수재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교류할 거라고 믿으신다면 지금 교육 현실을 너무 모르시는 안일한 말씀입니다(참고로, 저는 강남 출신이고, 아내는 교육자입니다. 선생님보다는 그쪽 현실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고교입시 부활의 결과는 학생들의 우열이 더 빨리 갈리고,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나이가 3년 일러질 따름입니다. 그리고 대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등학교 동문들의 끈끈함은 다시 한 번 이 나라를 "KS공화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겠지요. 그리고 더 불행하게도 이들의 동질성은 예전보다 더 강해질 것입니다.

예전의 명문고는 최소한 출신 지역이나 부모의 경제력에서는 차이가 났습니다. 선생님의 경우가 좋은 예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교 입시 부활은 이 차이조차 더 옅게 만들 것입니다. 사회 엘리트가 지나칠 정도로 동질적인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정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진리입니다.

선생님. 총장으로 업무에 바쁘셔서 이 글까지 읽으실 기회는 별로 없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이 글 하나로 평생의 지론이 바뀔 리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마지막으로 무례함을 무릅쓰고 말씀드린다면, 제가 배워온 경제학은 끊임없이 그 연구 대상인 사회를 관찰하고 교류하면서 스스로를 수정, 발전시켜온 학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청소년기의 경험은 분명히 그 시대에는 진실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급변하는 사회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회과학이 도태되듯이 선생님의 진실은 이미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은사님께 무례가 심했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고 총장이 끝나시면 다시 학생들에게 돌아와 좋은 강의로 진리의 눈을 띄워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