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왜 삭발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냐는 물음에 “부모들이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파출부까지 한다는데, 장애아를 둔 부모로써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당연한 것 아니냐?”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씨는 “아직은 윤임이가 어려서 그래도 견딜 수 있지만 점점 커 가는데 앞으로의 일이 큰 걱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김씨는 9년 전 의료사고 당시 병원과 수년간 외로운 싸움을 벌였다. 2년여의 싸움 끝에 의료사고라는 판결을 얻어냈지만 그 후속조치는 어이가 없었다.
아이의 수명을 8살로 산정을 해서 그때까지의 치료비만 보상 받을 수 있었지 그 외의 다른 책임은 전혀 지질 않았고 모든 치료는 가정에서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다.
사고 발생 이후 9년이 되었지만 윤임이는 아직도 24시간 김씨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대소변은 물론이고 김씨의 손길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 하다. 학교교육에서 해결되지 않는 치료교육을 위해 김씨도 월 50만원 이상 지출을 하고 있다.
개인택시 운전을 하는 남편의 수입으로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4가족이 생활하기는 빠듯하기만 하다.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아 벌이도 시원치 않다보니 저축은 생각도 못하고 먹는 것을 줄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윤임이의 치료교육비를 줄일 수는 없기에 김씨는 중1 아들에게 마냥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치료는 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짐을 가정이 떠맡아야 하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치료교육 사교육비, 월 50만원 이상 지출
의료사고 후 윤임이를 고쳐보겠다는 일념으로 김씨는 창원에서 서울을 수없이 오가며 대형병원을 찾아다녔다. 급기야 먼 길을 아이를 업고 다니느라 무리를 해서 왼쪽 다리를 수술하기까지 했다. 이런 노력에도 윤임이는 나아지질 않았다.
3년 전 윤임이를 학교에 보내야 했지만, 막상 아이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 근거리에는 학교도 없고 설령 일반학교에서 받아준다고 해도 장애 정도가 심해 통학이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다니는 학교도 하루 3시간을 허비하며 통학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은 한 여성을 투사로 만들었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보며 김씨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장애인교육권과 관련한 투쟁의 현장에서 항상 만날 수 있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12일 삭발을 한다는 말을 듣고 등교 전에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엄마 제발 머리 자르지 말아요”라는 말을 해서 아들을 설득하느라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엄마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에 어떻게 하니? 니가 맡아야 하는데 힘들어서. 이것은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라는 말로 설득을 했지만 어느 정도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함안장애인부모회 결성 위해 동분서주
이러한 활동을 통해 경남장애인부모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지금은 함안장애인부모회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어렵게 장애인 부모들의 연락처를 확보해 안내문을 보내며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김씨의 활동은 함안지역 장애인 부모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안내문을 받은 장애인 부모들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연락을 하며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을 요구하고 있다. 김씨 자신도 그랬듯이 다들 정보가 없어서 가슴앓이만 하고 있던 차라 반응들이 뜨겁다.
현재 함안군에는 30세 이하 장애인이 256명이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는 장애아동은 30명 정도. 대부분 학교 한 번 가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다. 이런 사정들을 말하며 부모들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소연이다. 특히 나이가 많은 부모들은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있어 그 상태는 더 심각하다.
김씨는 3년 전 운동 초기와 지금의 변화에 대해 “세상이 바뀌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김씨는 장애인교육권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이 부족해서 항상 새로운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그래도 윤임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24시간 같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누구보다 더 이뻐요”라고 환하게 웃는 웃음이 고통 속에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