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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탄> 표지
ⓒ 문학동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것은 시인 안도현의 유명한 시(詩) <너에게 묻는다> 전문이다.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http://www.lovecoal.org 이사장 변형윤)과 함께 하는 스물네 개의 훈훈한 이야기책 <연탄>의 '연탄이 있던 집'에도 인용돼 있다.

<연탄>에는 시인 김지하, 안도현, 원재훈, 소설가 신경숙, 방현석, 조선희, 박민규, 이명랑, 한창훈, 이순원, 보건복지부 장관 김근태, 화가 황주리, <연탄길> 저자 이철환, 드라마작가 이선희, 노희경, 방송인 임백천, 영화배우 오지혜, 자유기고가 박사, 백은하, <프리미어> 편집장 최보은, 출판편집인 김지호, 대한석탄공사 감사 이동섭, 제주은행장 김국주, 장성광업소 직원 가족 한태숙 등 명사와 다양한 작업인 24인의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다.

"서울에 처음 와서 오빠와 외사촌이 살던 방에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방만 서른몇 개가 있는, 주인은 다른 곳에 살고 세입자만 사는 그런 집이었다"로 시작하는 신경숙의 '그가 살았던 골목'에는 불 피운 연탄을 팔던 구멍가게 아저씨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가슴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먼 데서 보면 사람은 안 보이고 뻘건 불만 보였다. 그 골목에 사는 사람들 대개가 시골에서 상경해 공장에 다니며 늦은 시간까지 잔업들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연탄불 장사는 호황이었다 (중략) 그래도 그 구멍가게 아저씨는 외사촌이나 내가 연탄집게를 들고 가면 맨 먼저 우리에게 불붙은 탄을 내주었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뭐라뭐라 구시렁거리면 일하랴, 학교 다니랴, 애쓰지 않소, 묵살해버렸다.그의 얼굴에 있던 칼자국 흉터.' (27쪽)

'그 겨울날들, 그저 손이 곱지만 않다면 떨어져나갈 것같이 귀때기나 뺨이 시리지만 않는다면, 통틀어 몸만 춥지만 않으면 다른 일은 어찌 되어도 괜찮다, 싶었던 때에 불이 붙어 있는 시뻘건 연탄을 집어주는 구멍가게 아저씨는 구세주 같았다.' (27쪽)

'그는 가끔 석고를 버무려 가브리엘상이며 마리아상을 떠내곤 했다. (중략) 구멍가게의 그는 어느 날 깊은 밤에 그 골목에 침입자들처럼 난입한 사람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중략)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놈이라도 내겐 하나밖에 없는 자식놈"을 기다리는 노모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빨랫비누도 팔지 않았다. 산도과자도 휴지도 담배도 팔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마다 두부 한 모를 사려고 콩나물을 사려고 저 멀리 다른 골목까지 다녀와야 했다. (중략) 그는 우리가 수많은 방이 있던 그 골목의 그 집에서 떠나올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27~29쪽)


이 수필을 읽으며, 역시 신경숙씨는 '연탄'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깊은 슬픔'을 되살려내는 '깊고 따뜻한 마음'이 있는 소설가라는 생각을 했다.

'연탄'을 이야기하는 김근태의 시선은 달동네로 가 있었다.

'얼마 전, 참여연대에서 준비한 '최저 생계비 한 달 나기 희망 캠페인'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달동네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의 서민들은, 여름엔 난방비가 안 들어 그나마 낫지만, 겨울이 되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아느냐고 하소연했다. 부끄러웠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추위와 가난에 허덕여야 한다는 이 현실이. 이제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연탄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여전히 소중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32쪽)

수배중이었기 때문에 '스며들기 쉽고 도망치기 좋은' 방을 선택해야 했던 방현석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면 퇴근할 때 주안이나 제물표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전입신고를 하지 않고 살다가 마침내 걸려들 사정에 이르렀다.

'"오늘 동사무소에서 사람이 두 번이나 왔다 갔어. 그 왜 전입신고는 하라니까 안 해서 그래."
잔업을 마치고 돌아와 주인집에 연탄 밑불을 빌리러 간 나를 향해 아주머니가 한 말이었다. (중략) 그 밤으로 나는 그 집을 나와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주인집에서 빌려온 밑불로 연탄을 피워놓은 채로 말이다.
그해 겨울 그 집에 남겨두고 온 곳이 피워놓은 연탄 한 장만은 아니었다. 재래식 화장실 옆에 붙은 연탄 광에는 내 몫의 연탄이 오십 장쯤 있었을 것이다. (36쪽)


방송인 임백천은 매일 불 가느라 고생하는 어머니를 도와드리지는 못하면서 연탄재를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악동들의 모습을 재현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밤 열두 시에 연탄 갈고 자야 한다며 앉아서 조시던 어머님의 사랑 덕택에 우린 추운 겨울, 하루도 냉방에서 자는 불상사가 없었다. (중략) 그래도 누구 하나 어머님을 대신해서 연탄불을 갈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그지없다. 우리집은 방이 모두 세 개였으니까 연탄을 갈려면 하루 세 번씩 갈아도 아홉 장. 때를 놓치지 않고 가는 것도 큰 일이었으리라.' (42쪽)

'골목에 쌓인 연탄재는 당시 개구쟁이들의 장난감이었다. 동네 남자애들 눈에 띈 연탄재는 발에 차여서 모두 박살이 났다. (중략)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그때 우리 동네 연탄재를 가루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하고 친구들이었다.' (42쪽)


이렇게 양심선언(?)하는 임백천은, 소설을 써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힘차게 이야기꾼 능력을 발휘한다. 동생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했다가 병원에서 간신히 살아난 이야기, 설탕 볶아 먹다가 국자 홀랑 태우고 어머니한테 혼난 이야기,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포즈할 때 "결혼하면 연탄은 내가 다 갈아줄게" 하고 유행처럼 거짓말하던 이야기, 재래식 변소가 대부분이던 시절에 똥지게를 지고 가던 아저씨가 그만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좁은 골목이 똥밭이 되었을 때 거기에 연탄재를 뿌려 수습한 이야기 등이 다채롭게 깔려 있어 읽는 이를 미소짓게 한다.

그리고 김건모의 말을 빌려 인생철학 한 가지를 펼쳐놓았다.

'요즘 애들은 연탄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고 한다. (중략) 최근 들어 국민가수라고 불리는 김건모의 앨범 재킷 표지에 연탄 사진이 실린 걸 봤다. 그는 앨범 재킷에 자기 사진 대신 연탄 사진을 실었다. 그 재킷에 까만 연탄부터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다가 나중에 하얗게 된 연탄재 모습을 담으면서 그는 아주 철학적으로 설명했다. 번개탄 때문에 불이 붙었는데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아는 연탄은 다 타고 나서야 자신에 대해 깨닫는다고. 자신을 빗댄 이야기겠지만 우리 인생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46쪽)

이 단락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연탄의 '희생 가치'를 떠올렸다. 적당한 때 잘만 붙이면 번개탄도 필요없으니, 자신을 재로 만들어 가면서 다른 연탄을 불붙여주는 연탄의 마음은 얼마나 갸륵한가. 그런데! 연탄가스가 있어서 사람을 해칠 때도 있으니 인간에게 반드시 이로운 존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장통 소설가 이명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탄불만은 꺼뜨리지 않으려고 하는 어머니의 고집'을 아버지의 유치장 감금 사건 때문에 벌어진 일화로 소개하며 이렇게 '어머니 사랑'을 은유했다.

'내게 어머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불꽃보다도 강한 온기다' (74쪽)

시인 원재훈은 지하철 출근길에서 시인 김기택의 '연탄가스를 적당히 마시면'이라는 시를 읽다가 운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시에서 연탄가스 냄새가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에서 나는 연탄가스는 나를 중독시키는 대신에 울게 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177쪽)

드라마 작가 노희경은, 암투병중이라 밥도 토하고 죽도 토하고 국도 토하던 어머니가 연탄불에 고구마 서너 알을 구워 드리면 잘 드셨다는 슬픈 과거를 떠올리며 돌아가신 당신을 그리워하는 아픔을 전했다.

필자들의 어느 이야기 하나 놓쳐도 괜찮은 것이 없고 값지지 않은 것이 없다. 문득 세상이 참 춥다고 느껴질 때, 이불 덮고 이 책을 가만히 읽노라면 (도시가스 보일러가 가동되지 않더라도) 가슴이 훈훈하게 데워질 듯싶다. 편집자가 '연탄불 위의 고구마처럼 달콤하고 연탄가스처럼 알싸한 이야기'라고 소개한 200여 쪽의 아담한 책 <연탄>. 이 책을 읽은 느낌을 정리하면 이렇다.

'아프다! 그러나 훈훈하다. 그러므로 감동적이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연탄, 그러나 아직도 가난한 달동네에는 연탄이 있다. 아직도 19만 가구가 그렇다고 한다.

시인 김지하는 '어느 날인가 남북이 같이 모여 연탄 갈비를 가난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맛과 멋과 추억으로 나눠 먹을 때가 오리란 확신'을 '연탄의 해석학(시커먼 죽음 속에 숨어 타는 시뻘건 생명의 불꽃. 뜻밖에도 연탄의 도움으로 그 황량한 빈 산의 기억으로부터 나는 조국 통일이 단순한 당위가 아니라 역설에 의해 변화되는 새 차원의 현실임을 보았고 그 황량함에 의해 오히려 북돋워지는 북녘 동포들의 가슴속 숨은 불꽃을 해석해낼 수 있었다)'에서 암시받는다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래 이젠 이렇게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탄이 모자란 십구만 가구에 연탄을 보내자!"
당연하다.
한 발 더 나간다.
"연료 결핍을 느끼는 북한 동포들에게 연탄을 보내자!"
당연하다.
내가 쓴 이 22매 원고료 모두를 연탄값으로 돌리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돌려랏-!
당연하다.' (14~15쪽)


이 책의 필자들은 인세를 모두 받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필자들의 뜻에 따라 전액을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에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연탄 -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과 함께하는 스물네 개의 훈훈한 이야기

김지하 외 지음, 문학동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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