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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문제연구소가 작성해온 감정목록. 대학 유인물과 함께 한겨레신문 '손석춘 기자'가 쓴 기사와 한겨레21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
공안문제연구소가 작성해온 감정목록. 대학 유인물과 함께 한겨레신문 '손석춘 기자'가 쓴 기사와 한겨레21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 ⓒ 오마이뉴스 박형숙
경찰대학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소장 전병룡)의 좌익·용공 감정행위는 한마디로 무작위 대상과 무기준 평가였던 것으로 국감 자료에서 드러났다.

공안문제연구소는 5공 때까지 치안본부 대공분실 산하 내외정책연구소가 전신. 경찰, 국정원, 기무사가 의뢰한 출판물이나 유인물에 대한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은 좌익·용공·반정부·문제없음으로 분류돼 경찰 수사는 물론 검찰, 법원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무시 못할 '참고서'가 되어 왔다.

그 감정목록은 공안관련 피해자들의 지속적인 공개요구에도 불구하고 음지의 '금서'로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번 국정감사에서 첫 공개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공안문제연구소측이 최규식(행자위)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제출한 1993년부터 2004년 8월까지 수만 건의 감정목록(3급 비밀)에 따르면, 감정대상은 유인물·출판물에 그치지 않고 언론보도, 정당의 당헌, 기업의 연수자료, 음반, 영화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또한 같은 감정물임에도 불구하고 감정 연구원에 따라 평가결과가 다른 경우도 있어 공안문제연수가 일관된 기준조차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안감정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근태 장관, 국민회의 의원 시절 작성한 문건 '용공'
공안문제연구소 사상검증, 정치인도 예외는 아니다

공안문제연구소의 사상검증에선 정치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열린우리당 의원)이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공동대표 시절 작성한 '향후 정국 전망과 국민회의 대응'(1994년)은 '반정부' 유인물로 감정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의회 진출 후에 작성한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하여'(1997년)는 '용공' 판정을 받았다.

전대협 의장 출신의 임종석·이인영 열린우리당 의원이 재야시절 작성한 '한국 학생운동을 돌아본다(1997년)' 역시 '용공'으로 감정결과를 내렸으며, 같은 당 유기홍 의원이 1995년 청년대토론회에서 발표한 '정치상황의 변화'라는 문건은 '기타'(문제있음), 그리고 유시민 의원이 의회 진출 전 출판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용공'으로 분류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당 자체에 대한 사찰과 별도로 의원 개인이 의회 진출 전 노동운동 등에서 활동하면서 작성한 문건에 대한 지적 사항이 많았다. 심상정 의원이 1993년 전노협 시절 작성한 '93년 임금인상 투쟁의 목표와 방향'은 '반정부', 또한 같은 시절 단병호 의원이 작성한 '93 년 노동법 개정 투쟁 활성화 방안' 역시 '반정부'로 분류됐다.

이 같은 내용은 공안연구소가 최규식 의원측에 제공한 1993년부터 2004년 8월까지의 8만 건에 달하는 감정목록에 간략하게 기록된 사항이며, 연구원의 문건에 대한 구체적인 감정내용에 대해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권장도서 '난쏘공' '다현사' 등 좌익용공

공안문제연구소의 연간 감정 분량은 평균 7831건으로 △1998년 9930건 △1999년 7570건 △2000년 5788건 △2001년 8969건 △2002년 7771건 △2003년 6959건으로 나타났다.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하나 연구원 1인당 하루 평균 감정 분량은 2건에 이를 정도로 상당하다.

의뢰기관별로는 2000년부터 2004년 8월 31일 현재까지 경찰이 3만1775건으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국정원 2193건, 기무사 143건 순이었다.

감정물의 90% 가량은 대학유인물. 한총련과 각 대학 총학생회가 작성한 농활자료집부터 각종 회의록, 간부수련회, 집회 연설문, 대학교지·신문 등까지 광범위하다. 특히 총학생회 대외비 문건도 감정이 이뤄지고 있어 대학에 대한 사찰이 여전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남게 한다.

이미 소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좌익'으로 판정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논란이 됐던 것을 비롯해 연구소의 감정목록에는 베스트셀러와 중고등학생 권장도서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 예로 소설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은 '문제성'으로 분류된 것을 비롯해 박세길의 <다시 쓰는 현대사>(1-3권)는 좌익·용공,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고리끼의 <어머니>, 고리의 <닥터 노먼베쑨> 등도 용공으로 분류되었다. 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한홍구의 역사이야기>와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도 감정대상이었으나 '문제없음'으로 분류되었다.

학술논문과 종교서적도 감정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의학서인 <실용 동의약학>(일월서각)이 '용공'인 것을 비롯해 한국문학사에 출판한 국문학술서 <시조집>과 <시론>은 모두 '용공', 한국문화사 출판의 <인구학 개론> <예술론 개론> 등도 각각 '용공'과 '좌익'으로 분류되었다. 종교서적인 <예수와 묵자>(일월서각)는 감정결과 '문제없음'이었다.

언론도 예외 없어....KBS 심야토론은 용공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의 사색'에 대한 3쪽짜리 감정서. '성격' '내용분석' '총평'으로 이뤄진 이 감정서는 송 교수의 저서를 국보법과 준법서약서 철폐 등을 선동한다고 하면서 '반정부성' 문건으로 평했다.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의 사색'에 대한 3쪽짜리 감정서. '성격' '내용분석' '총평'으로 이뤄진 이 감정서는 송 교수의 저서를 국보법과 준법서약서 철폐 등을 선동한다고 하면서 '반정부성' 문건으로 평했다. ⓒ 오마이뉴스 박형숙
<한겨레신문>와 <월간 말>, <노동자신문> 등 진보언론에 대한 감정을 비롯해 KBS,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의 보도내용에 대해서도 이적성 검증작업이 이뤄졌다. 언론감정의 특징은 주한미군, 한미행정협정(SOFA), 국가보안법 등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감정대상이 된다는 점이며 또 실제로 용공, 반정부 등으로 낙인찍었다.

<월간 말>에 대해서는 거의 일상적 사찰이라 할만큼 다수가 좌익·용공·반정부 등으로 분류되었다. '전쟁억지를 위한 진보진영의 과제' '불청객 주한미군 언제까지 모실 것인가' '조선일보의 세계적 오보 성혜림 사건은 없었다' 등 수백 건에 달한다.

한겨레신문의 경우 특히 출판물에 대한 검열이 많았다. "남북한간의 소모적인 대결을 종식시키고 진정한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는 책"(세계일보 98년 2월 27일)으로 평가받은 <새로운 세기를 위하여>(정상모)를 비롯해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송두율 교수의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계인의 사색> 등이 감정대상이었으며, 특히 송두율 교수의 <분단과 민족의 변증법>은 '찬양동조'로 분류되었다.

KBS의 심야토론을 '용공'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2002년 12월 7일 방영된 길종섭의 심야토론의 주제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여중생 촛불시위를 계기로 마련된 '반미감정확산 어떻게 풀 것인가'. 경찰청 보안국의 지시로 이뤄진 감정에서 이날 방송분은 용공으로 분류되었다. 이날 토론의 패널은 이장희, 한홍구 교수를 비롯해 김승국 민화협 의장과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등이 출연해 토론을 벌였는데 공중파를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실이다.

연합뉴스의 경우 북한전문의 정일용 기자가 쓴 '북한주적 명시 안해' '납북자에 대한 북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심규섭 기자의 '민족대단결이 곧 통일강조' 등 결코 적지 않은 수 건의 기사가 감정대에 올랐다.

제주 4·3의 참극을 소설화해온 소설가 현기영이 한국일보에 기고한 '4·3 아직도 금기인가'라는 칼럼을 '반정부'라고 감정한 것은 역설적이다. 현기영씨는 현재 문예진흥원 원장으로 '정부인사'로 재직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북한에 다녀왔습니다' 방북취재기도 감정대상에 올랐다. 중앙일보는 2002년 7월 평양 현지에 기자를 보내 변화된 사회상 등 방북기를 연재한 바 있다.

한편 월간조선의 편집장 조갑제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애국심 없는 대통령(2003년 8월 24일)'을 '반정부성' 문건으로 판정한 점도 이채롭다. 조씨는 이 글을 통해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에 대해 국가원수로서의 자존심이 없고 애국심도 없다고 비난했는데 연구소측은 "전직 대통령과 현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방과 사실왜곡을 하고 있다"며 반정부성 문건이라 판단했다.

대신증권 인턴연수자료는 왜 용공인가

이 밖에도 일반기업에 대한 사찰을 비롯해 극장개봉 영화, 합법 음반 등에 대해서도 검열이 이뤄졌다. 대신증권인력관리부에서 펴낸 '대신증권 인턴사원연수자료'는 용공 판정을 받았으나 감정내용은 공개되지 않아 이유는 알 수 없다.

문화예술작품에 대한 감정은 영화 <실미도>와 정태춘·박은옥의 <아 대한민국> 앨범이 대표적이며 민예총에서 발간하는 월간 <민족예술>은 상당수 좌익·용공이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회보, <민족미술소식>지 등 문화예술단체에서 나오는 자료들에 대해서는 꾸준한 사상검증이 이뤄져왔다.

공공연하게 알려진 전국연합, 민주노총, 민언련 등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공안기관의 내사의 실체도 이번 감정목록서 공개를 통해 드러났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경우 2000년 창당 이후 280여 차례 감정이 이뤄진 데다가 의회진출 후인 올 4월 이후에도 '사찰'이 지속되는 것과 관련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당헌 전문을 찬양동조로, 창당선언문을 용공으로 판정해 법적용에 따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적용, 당 해산사유가 된다는 점에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이처럼 사찰대상이 광범위하다는 점 외에도, 연구원에 따라 같은 문건에 대한 감정결과가 상이한 경우가 있어 최소한의 기준마련도 없이 고무줄 적용을 해왔다는 점에서도 논란이 예상된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가 지난 2000년 '한국 국가보안법폐지국제행동' 집회를 열었는데 이날 나온 유인물에 대해 A연구원은 문제없음으로 감정했지만, B연구원의 감정결과에 따르면 "6·15 선언 이후에도 국보법으로 인한 탄압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반정부로 감정했다.

또한 국회의원이 말하면 문제가 안되고, 한총련이 말하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2000년 송석찬 민주당 의원(현 열린우리당 의원)이 국보법 폐지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를 강원지역 한총련이 발췌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며 '시대착오적인 반민주, 반인권적인 악법'으로 표현해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규식 의원은 18일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이날은 결과를 토대로 공안문제연구소의 무차별한 사상검증의 실체를 집중 추궁할 예정이다. 한국일보 정치부장일 시절, 공안문제연구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는 최 의원은 "처음엔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놀라움을 표시한 뒤 "단지 객관적 기준 없이 감정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수사기관의 하수인처럼 연구소가 감정서를 남발해 해왔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이 문제와 관련 공안문제연구소 소장과 연구원 1명을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한나라당이 반대해 증인채택은 이뤄지지 않은 상황. 따라서 한나라당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표결처리를 해서라도 즉석에서 증인으로 채택하겠다는 방침이다.

"감정업무 줄이고 테러·탈북자 연구하겠다?"
피해자들 '해체' 주장에 공안연구소 '개선방안' 모색 중

▲ 지난 12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경찰대학교 앞에서 열린 공안문제연구소 규탄기자회견.
ⓒ민중의소리 한승호

최근 공안문제연구소의 실체가 하나둘 공개되면서 연구소 폐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연구소측도 시인한 조직감정의 대상인 '한청(한국청년단체협의회)'은 지난주 연구소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연구소 해체를 주장했고, 한상희 교수(건국대 법학) 등 전문가들도 "철저한 비밀주의에 싸여 자의적·편의적 권력행사를 해왔다"며 같은 주장을 폈다.

이후 공안문제연구소는 자체적으로 연구소의 정체성과 관련 내부논의를 해왔는데 최근 경찰청 보안국과 협의 하에 감정의 객관성 확보를 골자로 하는 조직 개선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연구원 2인 이상의 복수감정 및 외부인사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를 도입해 공동감정과 위원회 심의를 거쳐 감정의 객관성을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또한 이 관계자는 "홈페이지 개설 등을 통해 감정기준과 감정통계 등 연구소 운영상황을 공개하고 국민과 호흡하는 기관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주요 개선방향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감정업무를 대폭 줄이고, 국가안보와 테러·탈북자 대책 연구 등 연구업무를 늘려가면서 궁극적으로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과 같은 독립된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기본입장이라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에 대해 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공안문제연구소가 현대사에서 어떤 일을 자행해 왔는지에 대한 실체 규명이 우선"이라고 전제한 뒤 "경찰측이 잘못을 확실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토대 위에서 방안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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