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길을 여쭌 후 오늘 아침 도솔암을 찾기로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 걱정이 되셨나 보다. 지난 밤에 도착해서 미처 보지 못한 땅끝 마을을 둘러보다 보니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사실 달마산 도솔암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은 최근 일이다. 어느 분이 달마산 도솔암에 꼭 가보라고 강조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도솔봉과 도솔암은 일반 사람에게 생소한 곳이다.
반도의 끝자락 해남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다가서 있다. 좁은 시골 도로에는 탈곡한 벼가 널려 있는 황금빛 논이 만들어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가을을 맞이하는 코스모스와 억새의 숨결이 있다.
스님이 알려준 대로 차를 모는데 멀리 도솔봉과 송신탑이 보인다. 마을길을 벗어나자 차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장단을 맞추며 한 번씩 기울기 시작한다. 얼마를 올랐을까. 웬만큼 길을 오르자 하늘과 구름이 지척이고 바둑판 같은 논과 들, 초가지붕 같은 섬과 산이 바다 위에 떠 있다.
차는 어느새 설마 하던 송신탑의 턱밑까지 와있다. 차를 몰아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올 수 있다니 놀랍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곳은 그곳에서 맞이하는 사방의 풍경일 것이다. 그 놀라움에 잠시 마음이 출렁인다. 마음의 출렁임은 바람을 부르고 '스스슥 스스슥' 들풀 또한 나의 출렁임에 보조를 맞춘다.
송신탑 아래에서 도솔암을 향하는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도솔봉의 능선들을 오르내리며 향하는 길이고 하나는 능선의 아래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나는 능선을 오르내리는 위쪽 길로 바삐 들어섰다. 한 굽이 올라설 때마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나타나고 사방으로는 누구 말처럼 달력 겉표지에서나 보았음직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도솔봉에서 진도를 내다보는 해남군 송지면 일대에는 유난히 저수지가 많다. 크고 작은 저수지가 얼핏 세어도 대여섯인데 멀리 남해바다까지 있으니 땅이 물을 담은 것인지 물이 땅을 담은 것인지 모르겠다.
기암괴석들이 줄지어 늘어선 능선길은 연신 나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달마산의 바위능선으로 올라서면 사방으로 다도해가 탁 트여 능선길 내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혹자는 기암괴석이 즐비한 달마산을 월출산에 못지 않은 명산이라고 하고, 남쪽의 금강산이라고도 하는데 나같은 무지렁이의 눈으로 보아도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달마산에는 도솔암 외에도 미황사라는 절이 유명하다. 또 실제 많은 이들이 찾는 절이기도 하다. 미황사와 도솔암은 모두 두륜산 대둔사(대흥사)의 말사다. 도솔암은 통일신라 말 화엄조사 상공(湘公)이 창건한 절로 암자가 소실되어 암자 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얼마 전 법조스님이 부처님의 가피와 법음이 반도를 지나 대륙을 넘어 유라시아까지 다시 퍼지기를 바라는 원력으로 복원하였다.
나중에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중국이나 인도에도 달마산이라는 이름은 전하지 않는 특이한 산 이름이라고 한다. 창건 과정이나 중창 과정에서 혹은 모양이나 생김이 달마대사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나중에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스님의 말씀이다.
능선길을 걷는 재미와 주위 풍경에 흠뻑 취해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암자와 용샘이 있는 갈림길이다. 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면 불룩 솟은 암벽 사이에 돌을 메우고 조그마한 전각이 비집고 들어차 있다. 바위 틈새에 들어차 있는 형태는 옹색하지만 일단 마당에 들어서면 웅대한 달마산 도솔봉의 기운과 앞으로 펼쳐지는 남해의 시원스러움, 거만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산과 들을 가득 안고 있다.
도솔암 앞마당에는 도솔봉의 기암들처럼 제멋대로 생긴 의자 하나가 있다. 그 의자에 앉으면 눈과 마음 가득 펼쳐지는 풍경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마음이 시원스레 씻겨지는 곳, 그곳이 도솔암이다.
도솔암에서 내려와 반대편 길로 내려서면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다. 말이 요사채지 가건물로 스님이 기거하는 방 한 칸과 손님을 위한 방 한 칸, 작은 주방이 다인 소박한 곳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완도쪽 남해바다가 펼쳐지고 위쪽으로 달마산의 능선이 그림같이 펼쳐지는 곳이다. 요사채 옆 평상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셔도 부러울 것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도솔암 스님의 법명은 법조로 은근한 전라도 말씨와 묵직함이 느껴진다. 스님에게 차를 얻어 마시며 도솔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점심까지 얻어먹었다. 나물의 향과 맛은 입안에서 시작해 내 온몸에 생기를 돋운다. 수도를 고친다고 나서는 스님은 내게 용샘과 거북바위를 가리키며 보고 가라 하신다.
거북바위는 요사채와 도솔암 갈림길에서 조금 더 가면 만나는 봉우리 아래쪽에 있으며 용샘은 도솔암쪽 길로 잠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 용샘이 있는 용담굴에서 의조화상이 득력하여 미황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도솔암 갈림길 위에 있는 봉우리는 길게 뻗은 달마산의 능선 중 하나지만 그곳에 올라서자 탁트인 주위 풍경이 놀랍도록 아름답다. 내가 지나온 송신탑이 보이고 멀리 반도의 끝자락도 보이는 듯하다. 육지쪽으로는 아름다운 달마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솔암에서 내려오는 길은 능선 아래쪽 길을 택했다. 비교적 평탄한 산길이 이어져 처음 왔던 송신탑 아래 주차장으로 이어진다. 발밑으로 만나는 가을은 신발과 바지를 거슬러 내 마음도 가을빛으로 물들인다. 10월 중순의 달마산 도솔봉은 그렇게 가을과 조우하고 있었다.
오를 때와는 다르게 내릴 때에는 너무 허탈하게 산 아래 마을까지 와버렸다. 그래서 좀 전 지나온 일들이 일시적인 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스님과 차를 마시고, 도솔암 의자에 앉아 땅끝 달마산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 잠시 무언가에 홀려 황홀경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을에서 스치는 솟대가 심상치 않다. 도솔봉 도솔암의 성스러움과 속세를 구별 짓고 경계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땅끝 해남에서 서울까지는 대략 천리길이라고 한다. 천리길도 마다않고 다시 달려가고 싶은 것이 도솔암을 향한 지금의 내 심정이다. 지금쯤 도솔암에는 가을이 한창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