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9년 '10.26 사건' 당시 필자는 대학 2학년이었다. 유신시대의 끝자락을 목격한 세대인 셈이다. 철들어 겨우 세상을 느낄 무렵 '박정희 시대'는 비극으로 종막을 고했다. 10.26 그 다음날 아침 필자는 군 입대하는 작은 형을 배웅하기 위해 새벽차를 탔다가 차 속에서 '박 대통령 유고' 소식을 접했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그 순간 잠시 내 몸이 굳는 듯 했다.
그의 사후 사반세기, 25년이 지났다. 그간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가운데는 여야간 정권교체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박정희 시대에 목에 힘줬던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세운 3공화국의 '식구'들 가운데는 현직 국회의원도 있다. 아직도 그의 수혜자들은 우리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그의 '큰 영애'는 제1야당의 당 대표를 하고 있다.
최근 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출생에서부터 집권 초반기까지를 다룬 <군인 박정희>를 펴냈다. 지난 여름 친일청산특별법 개정을 둘러싼 '박정희 논쟁'이 출간의 계기가 됐다. 사후 사반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는 '불사신 박정희'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취지로 펴낸 것이다. 이제 '백골이 진토'됐을 그를 떠올리면 애증의 감정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되레 앞서는 것은 왜일까.
그가 이승에서의 인연을 마친 1979년 그 해 그는 집권 18년의 한 획이랄 수 있는 '행정수도 이전계획'을 마무리 지었다. 이 계획의 최종보고서 명칭은 '백지계획'이었다. 흰 백지상태에서 이상적인 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담은, 일종의 '암호'였다. 당시 행정수도의 후보지는 이번에 신행정수도 후보지로 확정된 충남 공주-연기 일대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은 휴전선을 기준으로 평양과 남북으로 대칭점을 이루는 지점이다.
'백골이 진토'된 박정희와 행정수도 이전
지난 90년 '백지계획'을 특종보도한 경향신문 기자에 따르면, 그 구상은 참으로 화려하고 구체적이었던 것 같다. 중앙에 행정수도의 상징인 중앙청이 자리를 잡았고, 그 인근에 인공호수와 9홀 규모의 골프장이 딸린 대통령 관저가 둥지를 틀었다.
그 섬세함의 극치는 행정수도 내 가로수의 수종(樹種)까지를 언급한 대목이다. 이른바 '백지계획'은 계획 수립 11년 뒤인 1990년 청와대 이전, 이듬해 감사원 이전으로 대미를 장식토록 돼 있었다. 한 마디로 대역사였다. 행정수도의 꿈은 그렇게 착착 영글어갔다. 그러나 그 꿈은 그의 비극적 최후와 함께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 대선 공약의 하나로 신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난 21일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특별법 위헌결정'으로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헌재는 위헌 결정의 근거로 뜻밖에도 '관습헌법'을 들고 나왔다. 세상은 지금 관습헌법 논쟁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정부여당의 4대 개혁입법 등으로 갈갈이 찢긴 국론을 다시 갈갈이 찢어 놓고 말았다.
신행정수도 이전 특별법 제정 당시 다수당이었고, 또 이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던 한나라당은 지금은 수도이전 반대의 최전선에 서있다. 같은 당 소속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인천시, 경기도 등 수도권 지자체들도 죽자살자 식으로 행정수도 이전반대를 외치고 있다. 혹자는 이번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이명박 시장의 차기 대권가도가 활짝 열렸다는 성급한 얘기를 입에 담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지난 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행정수도 건설을 구상한 것은 안보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지난 국회 국방위 국감 때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국방부의 자료를 인용,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15일만에 서울이 함락될 수도 있다고 폭로해 전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 적이 있다. '남북상황'은 상당히 진전됐지만 이를 '안보문제'로 얘기를 바꾸면 상황은 박정희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박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계획을 완료한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서울은 남한 인구의 4분의 1이 거주하는 초밀집지대가 되어 있다. 교통난을 시작으로 환경, 주거, 교육 문제가 심각한 지경이다. 수도이전은 야당인 한나라당이 오히려 먼저 들고나옴직도 하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당운을 걸고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하고 있으니 지하의 박 전 대통령이 이를 안다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특히 자신의 딸이 한나라당의 대표로 있다는 것을 알면 또 뭐라고 할 것인지.
박 대표가 사무실에서 부친 사진 떼어낸 까닭
최근 박근혜 대표가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 걸려 있던 부친의 대형 액자사진을 철거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사무실 오른쪽 벽면 중앙에 자리했던 이 사진은 그간 박 대표 사무실의 상징처럼 비쳐져 왔다. 그런 사진을 박 대표가 4년만에 철거해 삼성동 자택 지하창고로 옮겼다고 한다.
이를 두고서 혹자는 박 대표가 부친의 후광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한 행동이 아닌지 관측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섣부른 판단으로 보인다. 박 대표는 적어도 부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집착적'이라고 할 정도로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부정적 결과를 자초하기도 했다.
지난 여름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들고 나왔을 때 박 대표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과잉반응을 보였다. 설사 여당이 '박근혜 죽이기'의 일환으로 군인 대상자를 중좌(중령)에서 소위로 계급을 낮추려고 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쳐도 그 때 박 대표는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다. 그게 박 대표의 마땅한 처세였다고 본다.
엄밀히 따지면 박정희는 여러 친일반민족 대상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나 박 대표가 이 문제를 부친과 관련시켜 지나치게 과민반응을 보인 결과 사안이 '박정희'로 좁혀졌다. 당연히 관심은 박정희로 주목됐고, 나아가 증폭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로 인해 박정희는 위원회가 심사를 하기도 전에 동네방네 '친일파'로 소문나고 만 셈이다.
박정희 그 자신은 생전에 일제시대 행적을 미화한 적은 없어 보인다. 어떤 자가 박정희를 비밀광복군으로 미화한 책을 만들어 청와대로 가지고 왔을 때 "내가 언제 광복군이었느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느냐"며 오히려 호통을 쳐 돌려보낸 적이 있다. 어쩌면 그런 점이 박정희의 군인다운 면모인지도 모른다.
또 자신의 좌익전력에 대해서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한 측근 비서관의 질문에 대해 "형님 친구를 따라 향우회에 참석한 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라며 남로당 가입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늘 '주변사람들' 때문에 터졌다. 여기엔 박 대표도 포함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건 우스갯말로 '박정희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미화한 적 없어... 문제는 주변사람들
새천년이 시작된 지금은 한 시대를 마감하는 시기다. 과거 권위주의, 개발 지상주의, 획일주의, 군사주의 문화를 걷어내고 자유와 균형과 상식을 찾아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때 박정희 같은 지도자는 매를 맞을 수 밖에 없다. 박정희는 개발독재 시절의 패러다임에서 요구되는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룬 성과는 긍정적 성과는 성과대로 또 다른 차원에서 제대로 평가될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까지도 감안해 그를 역사의 인물로 냉정히 평가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단순히 '박근혜 대표의 부친' 차원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한국 현대사 속의 보통명사가 되어 있다.
오늘 그의 25주기를 맞아 구미 생가, 문경 청운각(교사 시절의 하숙집)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 등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무덤속의 그를 편히 쉬게 하는 길은 지나친 추앙도, 과도한 비판도 아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그가 영면할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임을 다들 깨달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오늘 '10.26'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95주년임도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