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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 ⓒ 김형태
아직 시간(약속 시간 4시)도 있고 해서 신공항 주위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사방에 눈빛을 갖다 댔지만 날씨가 좋지 않은 관계로 가시거리가 짧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출국 수속을 밟고 수화물을 부치고 출국장에 들어섰다. 시간이 좀 나서 면세점의 여러 점포를 다니며 쇼핑을 하였다. 면세점은 다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품목 또한 다양하였다.

몇 가지 물건에 대해 가격을 확인하니 전자제품은 용산 전자상가 수준이었으나 술과 담배는 비교적 싼 편이었다. 밸런타인 17년산이 52불(6만원), 함께 동행한 최 선생님의 말로는 시중가격의 절반이란다. 면세점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세금이 많이 붙는 품목은 싸다 싶었다.

전부터 사고 싶었던 캠코더 등에 자꾸만 눈이 갔다. 지금 사가지 않으면 귀국할 때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능과 가격을 잘 몰라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아쉽지만 필름 몇 통을 사고 면세점을 뒤로 하였다.

원래 저녁 6시 20분에 이륙하기로 하였으나, 비행기가 연착하여 1시간 늦은 7시 20분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기내에서 밖을 내다보니 역시 날씨 관계로 뿌연 회색 구름 이외는 볼 수가 없었다.

일행들이 대부분 첫 해외나들이인 반면 나의 경우 이번 해외여행이 두 번째다.

지난 93년 8월, 7박 8일의 일정으로 동남아 여행을 다녀온 바 있다. 홍콩을 경유하여 태국의 방콕과 파타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을 둘러보고 왔다.

그때는 정말 날씨가 쾌청하여 서울이라는 도시는 물론 서해안의 바다, 태평양의 푸른 물결까지 내려다 볼 수 있어 좋았다.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여기저기 떠다니는 선박들이 마치 종이배처럼 보였었는데….

일기가 불순해서인지 비행기는 제법 흔들렸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중국 국제 항공기였는데, 안내 방송이 중국어와 영어로만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출발했고 또한 한국인 승객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한국어 방송이 나올 법도 한데 무척 아쉬웠다. 지난번 동남아 갈 때는 타이항공을 이용했는데 우리말 방송이 함께 나온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륙 안내 모니터에 우리의 '동해'가 'Sea Of Japan'으로 표기된 것도 몹시 눈에 거슬렸다. 하루 속히 시정해야 할 우리의 과제다. 다만 기내식이 김치와 제주산 생수까지 나오는 등 우리 음식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국력이 커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우리를 실은 비행기는 2시간 정도 하늘을 날아 북경에 도착하였다. 漢字(한자)는 한자인데 우리에게 낯선 한자인 간자체가 여기저기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분명 중국임이 분명했다.

북경공항은 생각보다 크고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지난번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새로 손을 보았단다. 그러나 우리의 인천공항에 비하면 전체적인 규모나 디자인은 뒤져보였다. 근무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무표정하거나 무뚝뚝해서 좀더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밖으로 나오니 북경의 현지 가이드와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인 김양은 올해 23세로 일본 유학을 준비하는 조선족 동포라고 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와 환한 표정,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경 거리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운전기사는 한족으로 '고따꺼'라고 했다. 고는 성(姓)이고 '따꺼'는 기사를 부르는 호칭이다. 우리는 여행사에서 준비한 차편으로 북경 시내를 향해 달렸다. 북경은 우리와 1시간의 시차다.

우리 시간으로는 9시 반이지만 중국 시간으로는 8시 반이었다. 1시간 젊어졌다는 말에 다들 웃음을 지었다. 서울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북경의 야경은 그런대로 아름다웠다.

길이나 건물 모습에서는 서울과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 이국적인 느낌보다는 언뜻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저녁식사를 위해 우리를 실은 차는 한 식당 앞에 멈춰 섰다. '설악산불고기'라는 식당이었다. 간판은 한자와 우리말이 병기되어 있었다. 식당 벽에 우리의 하회탈도 걸려 있고 우리나라 소주 광고도 붙어 있는 등 나름대로 한국적 분위기를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식당이 깨끗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종업원들도 대부분 십대 중반으로 어려 보였다. 돈 벌기 위해 시골에서 갓 올라왔는지 머리모양이나 복장이 촌스럽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식탁 밑으로 모기까지 돌아다녀 일행 중 몇 명을 할 수 없이 헌혈을 강요당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식사라서 무엇이 나올까 기대되었다. 김치와 된장, 콩나물, 감자볶음 등 언뜻 한국음식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먹어보니 우리식으로 흉내를 냈지만 어쩐지 어설퍼 보였다. 여행안내 책자에 나오는 것처럼 강한 향신료 때문에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향료 처리된 일부 나물은 도저히 먹기 힘들었다. 나는 뜨는 둥 마는 둥하다가 감자볶음과 함께 밥을 먹었다.

기내식을 먹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배고픔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후식으로 나온 '사과배'는 신기한 과일이었다. 중국에서 품종 개량된 특산이라는데 사과 모양에, 배 맛이 났다. 이것이 사과냐, 배냐를 놓고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쨌든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깨끗하고 정갈한 음식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아무래도 우리보다 위생관념이 떨어졌다. 일례로 물 컵이 깨져 있기에 바꿔달라고 했더니 가져온 것 역시 깨져 있었다. 중국 음식점에서는 깨진 그릇을 자랑스럽게 내놓고 있었다.

듣자니 깨진 그릇은 이 식당이 오래 되었다는 징표란다. 사람들이 그릇을 보고 이 식당이 오래 되었나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한단다. 절약이라는 점에서는 높이 살 만했다.

그러나 위생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권할 만한 것이 아니다 싶었다. 금이 간 정도라면 몰라도 이가 나간 그릇을 손님에게 내놓는다는 것이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후, 한참을 달려 호텔에 당도하였다. 가는 동안 북경의 밤거리를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베이징)은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다. 북위 39도 56분, 경위 116도 20분에 위치하며 화베이(華北)평야 최대의 도시다. 시의 총면적은 1만6808㎢이며 인구는 1100만을 넘는다고 한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지가 총면적의 62%를 차지한다고 하나 동남부에 펼쳐진 평지가 보아이(渤海)까지 완만하게 이어져 시내 중심에서 보기에는 산이 거의 없어 보인다.

온대 대륙성 기후의 특성으로 베이징은 사계절이 분명하나 봄과 가을이 짧고 겨울과 여름이 길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날도 낮 기온이 30도가 넘어 무덥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가이드 말로는 이 정도면 시원한 편에 속한다고 했다. 한창 더울 때는 40도를 넘는다고 했다.

베이징은 역사는 유구하다. 시의 남서쪽 50km 지점에 있는 저우커우텐(周口店)에서는 이미 69만 년 전에 베이징원인이 생활했단다. 주(周)나라 시대(B.C 3000년경)에는 북경을 '계(薊)'라고 불렀는데, 이때 성이 축조되고 나라로서의 형태가 잡혔다고 한다.

전국시대(B.C.403~B.C.221년)에는 당시의 강국 중 하나인 연(燕)의 도읍이 되어 발전하게 되었고, 그 후 당대(唐代618-884)에는 '유주(幽州)'라고 불렀으며 요대(북방 유목민 국가 907-1125)에는 제 2 도읍지가 되어 '남경(南京)' 또는 '연경(燕京)'이라 불렀다고 한다.

금대(金代 115-1234) 중기에는 성벽이 축조되었고 '중도(中都)'라고 불렀으며, 13세기 중기에는 원조(元朝 1281~1368)가 중도(中都) 구성(舊城)의 동북부에 새롭게 성을 쌓아 대도라는 도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도(大都)는 현재의 중남해와 북해를 중심으로 한 네모 모양의 성으로 오늘날의 베이징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1368년 명의 태조 주원장은 난징을 도읍으로 전하고 '대도'를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지만, 제 3대 황제 영락제는 다시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그 이름을 '베이징(北京)'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일반적인 명칭의 변경이나 천도는 있었지만 약 600년에 걸쳐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서 계속해서 군림했단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베이징에는 만리장성이나 고궁 등 옛 명소가 많이 남아 있다고 중국 안내 책자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은 북경의 서북부에 위치한 중원빈관(中苑賓棺)이었다. 꽤 고층건물이었으나 지어진지 한참이 되어서 그런지 4성급 호텔치고는 다소 낡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부 시설은 우리나라 장급 여관 수준에 불과하였다. 중국에서의 첫 밤은 그렇게 버스로 북경거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구경하는 것과 호텔 창 밖을 통해 밤경치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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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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