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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아리랑, 아라리오~ 3

8월 14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백두산에 가는 날이다.

연길은 북경보다 해가 먼저 뜨는가 보다. 동쪽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하늘이 깨끗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연길의 아침은 시골에서 맞는 것처럼 상쾌했다. 어제도 일찍 일어났지만 백두산을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서 그런지 오늘은 더 빨리 눈이 떠졌다.

씻고 대충 짐을 꾸리고 호텔 2층에 마련된 식당에 6시 50분쯤 내려갔다. 원래 7시부터 식사 시작이니 채 음식이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식당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5, 60 이상으로 보이는 한국인 관광객들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출발하려는지 짐을 식당에까지 가지고 와 있었다.

신비에 싸인 천지의 모습
신비에 싸인 천지의 모습 ⓒ 김형태
백두산이 무엇이길래 우리네 어르신들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바쁘게 했을까? 한민족이 아니면 그 누가 알랴! 죽기 전에 백두산 천지를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중국이라는 남의 땅을 밟으면서까지 돌아 돌아 여기까지 와 밤잠 설치고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백두산으로 향하는 마음을…. 성지 순례가 별 게 아니고 이게 바로 성지 순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은 야채 위주의 식단이었다.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먹을 만했다.

과속과 추월은 기본?

8시 40분, 우리 일행은 다른 팀에 비해 늦게 출발했다. 아마도 맨 마지막이 아닌가 싶었다. 어젯밤 빨리 출발하자고 말했더니 새 차이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차가 좋아 늦게 출발해도 아침 일찍 출발한 팀보다 먼저 도착할 거란다.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랐는데 출발하고 나니 바로 의문이 풀렸다. 중국에서 새 차는 과속이란 말과 통하는 모양이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청룡 열차를 탄 기분이었다. 중국의 도로에서 과속과 추월은 기본이요, 예사였다.

중국은 중앙선을 넘어 추월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였다. 고작 추월하면서 경적을 울려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였다. 거듭되는 과속과 추월에 손잡이를 잡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도무지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다가 개울에 누워 네바퀴가 하늘을 보고 있는 관광버스와 가로수를 들이받고 누워 있는 차를 보았다. 왠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가이드에게 속도를 좀 줄여 달라고 했더니 가이드는 우리 기사님(리따꺼라고 소개했음)은 백두산만 10년 넘게 무사고로 운전한 배테랑이니 걱정 말란다.

연길 시내는 이런 저런 말들을 써 넣은 현수막으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자치주 50주년 기념행사라고 했다. 인근 학교에서 매스 게임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도로와 가로등을 정비하는 사업이 한창이었는데 가로등은 다양한 형태와 색상을 지닌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달에 400원에서 600원(한국 돈으로 6만~8만) 정도의 보수를 받는데 조선족은 거의 없다고 했다. 조선족들은 남한에 가거나 한국 업체에서 일하면 10만원 이상을 벌 수 있어서 힘들고 보수가 약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족(가이드는 만주족도 포함하여 한족이라고 불렀음. 다시 말해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은 모두 한족이 되는 셈)들은 돈을 벌면 차곡차곡 모아 두고 쓰지 않는데 비해, 조선족은 펑펑 쓰는 편이라고 했다.

연변이 이렇게 활기차게 발전하는 이유는, 첫째 한국에서 돈 벌어 온 사람들이 건물을 짓고 가게를 내는 등 씀씀이가 커져서고, 둘째는 백두산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쏟아 내는 돈 때문이란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연변에서 백두산이 지척인 줄 알았는데 차편으로 5, 6시간이나 걸렸다. 시간으로 보면 서울에서 부산 가는 만큼의 길이니 참으로 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백두산이 그만큼 크고 넓은 산이라는 뜻도 된다. 따라서 대관령이나 한계령으로 넘는 것처럼 험산준령으로 이어져 백두산 가는 길이 무척 험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완만했다. 정말 몇 군데를 빼고는 평지를 가는 느낌이었다.

이 옥토를 버리고 한민족은 어디로 갔나

가는 동안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드넓은 산야들이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백두산 줄기다 싶었다. 너무나 넓은 산과 들에 일행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백두산 이북이 춥고 농사 지을 땅이 못돼 더 나은 옥토를 찾아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넓고 비옥한 토지를 버리고 남하하다니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함석헌 선생의 지적처럼 과연 만주는 우리 민족의 가슴이요, 벌판이었다. 어쩌다 우리 조상들은 이 신령한 땅을 지키지 못하고 이민족에게 내주었단 말인가?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완만한 산지는 대부분 농지로 개발되어 있었다. 어느 곳은 산중턱을 넘어 산꼭대기 가까이까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면 어디든 개발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우리 시각에서 보면 환경 파괴, 산림 훼손으로 보일 정도였다.

밭이 대부분이었지만 논도 제법 보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논농사는 조선족만 짓고 전통적으로 한족(만주족)은 밭농사만 지었단다. 조선족이 이주하면서 쌀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족은 백두산 가까이까지 개발하여 논농사를 짓고 있었다. 논이 있는 곳은 조선족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또 하나 조선족과 한족을 구별하는 방법은 건축 양식에 있었다. 즉 한족이 사는 집은 지붕 모양이 삼각형이었고 조선족이 사는 집은 오각형이었다. 더러는 담벽이 흰색인 집들이 있었는데 조선족의 집이란다. 흰색을 사랑하는 사람들, 백의민족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다 싶었다.

가다 보니 터널이 있었는데 차굴이라고 쓰여 있었다. 북한식 표현이란다. 차가 다니는 굴이라 차굴이라고 했다니 이런 자주적인 태도는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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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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