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30분,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고 찜질방을 호기롭게 나왔으나 주위는 아직 동트기 전이라 주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깜깜하다. 새벽의 싸늘한 한기가 옷깃을 마구 파고든다.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갑자기 체감 기온차가 크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감기기운이 약간 있는 어머니가 은근 슬쩍 걱정되었다.
순간 찜찔방에서 너무 일찍 나왔다는 후회가 아직 달궈지지 않은 자동차 히터의 싸늘한 한기와 함께 밀려왔지만 어쩌랴, 이곳 고산읍에서 화암사까지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는 달려야 하니 달리다보면 밝아질 것이고 조그만 느긋하게 기다리면 자동차도 따뜻해질 것이라며 억지로 마음을 추스르며 화암사가 있는 경천면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쯤 달리다 보니 히터에서 따스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주위도 점점 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저만치서 화암사를 알리는 조그맣고 소박한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자동차 한 대 정도 지나갈 만한 좁은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비포장 도로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어! 이상하다. 계곡으로 한참은 걸어야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계곡은 안나오고 웬 비포장도로 산길인가?"
그래도 비포장 도로 산길은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듯 소박한 시골 16살 아가씨의 수줍은 볼을 닮은 발그레한 빛깔의 단풍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야, 정말 좋다. 마치 숨겨진 곳을 몰래 들여다 보는 것같아. 어머니,그렇지 않아요."
뭔지는 모르지만 울퉁불퉁한 산길을 계속 오르고 있는 것이 뭔가 잘못 되었나보다 생각한 어머니, 얼굴을 슬쩍 보니 불안한 표정이 가득한데 딸내미 걱정할까봐 딸내미의 말에 억지로 화답하고 있었다.
"그래, 단풍이 아주 예쁘구나. 산길이 이렇게 뚫려 있으니 어디론가는 내려가겠지."
"그럼요. 이런 길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마를 지났을까? 잔뜩 어지럽혀진 공사현장 안내판에는 '화암사 극락전 공사현장'이라 써 있었다. 어찌어찌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화암사로 온 것은 맞는 것같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앞쪽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어슬렁어슬렁 헤매다 보니 이 절의 주인중 하나인 누렁이가 먼저 낌새를 눈치채고 '멍멍' 짖는다.
얼떨결에 공사현장을 가로질러 절 속으로 들어가니 콘테이너 박스에서 나오는 한 여 보살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보살님, 안녕하세요. 화암사가 좋다고 해서 아침일찍 화암사 구경하러 왔습니다."
"공사차량이 지나다니는 길을 보며 누렁이가 자꾸 짖어서 휴일인데 공사하시던 분이 어떻게 오셨나 하고 내다봤는데 시주님들이시군요. 추운데 이쪽으로 좀 들어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먼저 구경 좀 하겠습니다."
"그럼 구경하시고 이곳으로 오세요."
"네 고맙습니다."
금산사의 말사인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절이다. 산세를 보니 산 속의 정기가 모두 한곳으로 응축되어 화암사로 모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산이 이 절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절 자체도 극락전과 우화루와 적묵당과 불명당 4채의 건물이 크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ㅁ'자의 마당을 앞에 두고 서로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매우 정겨워 보였다.
"꼭 암탉이 알을 품은 모습같구나."
"어쩜, 정말 그렇네요."
어머니의 표현대로 암탉이 품은 알처럼 비밀스런 보물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니 마침 아까 보았던 여 보살이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아침공양 차려놓았으니 어머니와 함께 아침식사나 드세요."
콘테이너 속에는 이미 보살님이 정성껏 지은 하얀 쌀밥과 정갈한 나물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너무 아침 일찍 찾아와 불청객인 것같은 느낌이었는데 일부러 아침식사까지 차려주시는 호의가 마냥 고맙지만 괜히 폐 끼치는 것같아 부담스러웠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여 보살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왠지 아침에 두 모녀를 보니 아침공양을 차려드리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구요. 아마 내가 전생에 할머니에게 지은 빚이 있었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어 빚을 갚고자 한 것이니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찬은 없더라도 많이 드세요."
소박하지만 깔끔한 절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난 여보살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전생에 지은 빚이라..." 어머니야 전생의 빚갚음이라지만 나는 어머니 덕에 얹어 먹었으니 어머니나 여보살에게 또 다른 빚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생에 빚갚이도 제대로 못한 채 또 다시 빚만 지고 가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에 먹은 단촐한 절밥은 과히 꿀맛이었다.
인연이 있어야 만나는 절
지금 화암사는 대대적인 공사중이다. 계속 진행되었던 극락전 공사는 이제 마무리단계고 적묵당과 불명당과 우화루가 공사 준비중이라 철골 지지대가 이리 저리 둘러싸여 좀 어지러운 상태이다. 공사 때문에 주지스님과 공양주보살이 숙식할 곳이 없다보니 한쪽에 컨테이너로 추운 겨울을 지내야 할 판이었다. 겨울이 되면 걱정되시겠다는 말에 여보살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앞으로 와도 찾지 못해 구경조차 못하는 절이랍니다. 지금 두 시주님이 이곳으로 오신 것도 모두 이 화암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이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은 이 절과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러니 설령 비닐 하우스에서 산다 해도 부처님의 가호로 안전할 겁니다. 다행히 비닐하우스가 아닌 콘테이너 하우스니 고마울밖에요."
화암사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정말 대단했다. 그래서 그런지 화암사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예전에 한창 번성할 때 이 화암사는 매우 큰 사찰이었지요. 영험한 사찰이란 소문때문에 조선시대 상궁들이 며칠씩 묵으며 윗전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화암사는 신라 문무왕 때 지어진 것이라 추측되지만 확실한 창건자나 창건연대가 나타나 있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 근처의 별장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오색 찬란한 용이 놀고 있는 것이 보여 그곳으로 가보니 용이 놀던 자리에 무궁초가 피어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그 자리에 절을 짓고 화암사라고 했다지만 별다른 창건기록은 없고 오로지 화암사 경내에 세워진 화암사 중창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94호)에 나온 중창기록만 있을 뿐이다.
중창비의 기록에 의하면 1425년(세종 7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성달생이 화암사를 중창했다는데 중창 당시에는 꽤 큰 절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화재로 지금 있는 몇 채의 건물만 남긴 채 모두 사라졌고, 점점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쇠락해져서 해방 직전에는 주인 없이 버려져 있던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원래 일제시대 때 가족과 함께 살던 대처승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절이 궁벽하다보니 가족과 함께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냥 버리고 떠났다고도 해요. 한마디로 그 스님과 이 절과 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인가봐요."
인연이라... 그러고 보면 돌 하나 생명 하나 만나는 게 나쁜 인연이든 좋은 인연이든 모두 인연 아닌 것이 없는 것같다.
화암사와 나와의 인연, 옷자락만 스쳐도 몇겁의 인연이라더니 화암사와 나는 대체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아마 전생에 내가 우연히 화암사에 와서 내생에 다시 만나기를 기원한 까닭일까? 화암사와 나와의 인연을 상상하며 극락전의 부처님과 국가 위기때 스스로 울린다는 동종을 참배하고 밖을 나오니 바로 앞에 비닐장막을 쳐서 약간은 썰렁한 우화루가 보인다.
극락전과 우화루 매우 절묘한 이름이다.
우화루에 새겨진 믿음의 흔적
득도한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백만억 대중에게 설교할 때 대범천왕(大梵天王)이 꽃비를 내려 공양했다는 영산회상 속의 모습을 표현한 우화루, 이름만 봐도 석가여래와 깨달음의 법열에 찬 가섭존자의 교감이 오가는 은근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를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고 했던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우화루 들보에 반야심경을 써놓았다. 별다른 기교 없이 써내려간 반야심경, 그리고 그 옆에 칠 벗겨진 커다란 목탁 하나가 덩그라니 매달려 있다. 소박한 믿음의 흔적들, 그 존재감이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화려한 의미의 현판글씨답지 않게 외로워보인다. 그뿐인가? 가뜩이나 외로워보이는 우화루 밖의 목어 뒤는 불편하게 투명 비닐장막이 쳐져 있어 오히려 처량해보이는데 마침 불청객을 향해 그리 소란스럽게 짓던 누렁이가 그새 제법 낯이 익었다는 표정으로 꼬리를 살살 흔들며 주위를 오가고 있다.
'너도 이 산 속에서 꽤나 외로운가보구나...'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구조의 건축양식으로 유명한 극락전도 분명 볼거리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왜 이 우화루가 더 눈길이 가는 걸까? 우화루를 차근차근 둘러보고 있는 내 앞에 슬며시 여보살이 오더니 우화루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가르쳐준다.
6.25 때 이곳도 빨치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점점 형세가 불리해지면서 후퇴를 하게 된 빨치산이 화암사를 불지르기 위해 이 우화루 구석에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는 바람에 불이 꺼졌고 결국 빨치산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하는 나의 불신을 풀어주려는 듯 여보살은 우화루에 그을린 그때의 자욱들을 보여주었다. 그 그을린 자욱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보살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지 이곳에는 누군가 어떤 이유에서든 만들어 놓은 그을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곳에 이렇게 그을림이 남겨진 의미가 무엇일까? 아마 신비하고 영험한 절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훈장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외지인으로 인해 상처받기 싫다는 흔적이 아닐까?
그러나 의도했든 안했든지 간에 이미 화암사의 아름다움은 서서히 외부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제 이곳 저곳의 공사가 끝나면 화암사는 더욱 더 일반인들과 가까워질 것이다.
극락바위에 바람이 머물다
분명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화암사는 외롭지 않겠지만 관광객들로 인해 또 다른 상처가 생기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이런저런 근심을 덮고 여보살과 함께 광산 개발업자의 꿈 속에 부처가 나타나 "이곳이 내가 머무는 곳이니 훼손시키지 말라고 했다"는 극락바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극락바위에 앉아 단풍으로 가득 물든 산 아래를 굽어보니 모든 걱정과 애욕이 모두 언덕 위에 부는 바람처럼 부질없어 보인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惜兮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화상의 시를 불현듯 떠올리며 극락바위에 앉아 잠시잠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쩌다 이런 저런 인연이 쌓여 지금 이곳에서 저 아래의 세상을 아름답게 굽어볼 소중한 기회가 생겼지만 나 또한 어차피 또 다시 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할 몸, 비록 저 아래의 세상은 지금 보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지도 편안하지도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한걸음만 물러나 바라보면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값진 만남이었다.
나와 어머니는 여 보살과 누렁이와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하고 화암사를 떠나는 중이다. 새벽길을 헤매는 바람에 불청객처럼 우연히 뒷길로 들어와 우연히 만난 이런 저런 만남들... 산길을 걸어올라가는 것도 수행정진의 하나라는데 무심코 반칙을 하고 들어온 예의 없는 중생의 허물을 따스히 맞아주었던 화암사, 뒤늦게 우화루 정문을 보며 다시 한번 교만으로 가득찼던 내 마음의 갈래를 조용히 여며본다.
"다음 번에 시간이 나면 참회하는 마음으로 저 앞의 계곡부터 천천히 만나러 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잃지 말고 이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주시길..."
화암사를 내려와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 길가에는 따스한 가을 빛을 가득 품 안에 안은 감들이 줄줄이 늘어져 곶감으로 아름답게 태어날 꿈을 꾸고 있었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이제 다시 헤쳐 들어갈 피곤하고 힘겨운 세상도 정작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의미를 가슴 속에 되새기며 씩씩하게 세상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