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산면 소재지에서 무량사로 가려면 작은 골목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길 양 옆으로 나 있는 단층이거나 이삼층의 건물 몇 채를 지나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반깁니다. 은행나무 잎이 가득 떨어진 무량사로 가는 길.
은행나무 가는 길이 끝나면 플라타너스에서 벚나무로 느티나무로 이어지는 세상. 길이 끝나는 곳에 무량마을이 있고 마을이 시작되면 더불어 길도 또 이어졌습니다. 나무로 이어지는 무량사로 가는 길은 온통 단풍 천지였습니다.
아침햇살과 느티나무 잎 사이에서 그들보다 더 환하게 길을 밝혀주는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이 문을 들어설 때마다 일주문의 모양새가 전국 어느 절보다 아름답다고 여겨집니다.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런, 절과 세상과의 경계를 요란하게 구분짓지 않으면서도 제 몫을 다하는 무량사의 일주문입니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만수산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만나고 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모양새는 여느 다리와 같지만 일주문에 들어설 때보다 더 마음을 가다듬게 되는 곳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쉬 돌아서서 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다리를 건너면서 눈앞에 펼쳐진 가을 풍경은 말 그대로 무량합니다. 오래된 나무들이 많은 무량사. 특히 사람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느티나무가 절 안팎으로 많은 곳이 바로 무량사입니다.
절 안의 넉넉한 마당에 세월이 오래된 느티나무 몇 그루, 사람 가슴 정도 높이의 담 너머로 보이는 큰 나무들. 그들은 담을 세운 사람들에 의해 담 안과 밖으로 구분 지어질 뿐 한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된 나무들은 잎 하나도 가볍게 떨구지 않았습니다. 단풍든 작은 잎 하나에도 세월을 담아,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함께 제 몸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가을 무량사는 나무만 단풍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극락전 오래된 기와도, 단청도, 문설주도, 오층석탑도, 산신각도, 매월당 부도도, 모두 아름다운 제 색을 내고 있어 무량사의 가을은 무량했습니다.
나무가 단풍이 든다는 것은 제 본래의 색을 찾는 것. 제 색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무와 햇살 그리고 바람의 적절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무량사의 단풍을 보면서 내 안에도 색이 있는 것인지, 이 가을 낙엽 가득한 무량사 마당에 서서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다리를 건너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데 내 앞에 턱 버티고 있는 것이 바로 광명문(光明門)이었습니다.
들어올 때는 만수산 무량사(萬壽山 無量寺)였는데 나갈 때는 어느새 광명문이 되어 있었습니다.
무량사는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세상과의 경계를 짓되, 동시에 허물고 있었습니다. 담 안과 밖의 경계나 일주문 안과 밖의 구분이 허술한 곳이 무량사입니다. 절과 세상의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짓지 않지만 내적인 경계가 확연한 곳이 바로 무량사입니다.
세속과 절과의 경계를 짓고, 적당히 열어둔 무량사는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지만 무량사는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광명문, 이 문턱만 넘으면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 나는 빛을 찾아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화려했던 내 삶도 가고 이제 잎 떨구고 빈몸이 되어가는 나. 저 나무들처럼 한겨울 지나고 나면 내게도 새순, 잎 돋는 봄이 올 수 있을까? 그 봄을 위해 나는 세상과의 경계를 어떻게 짓고 어떻게 허물어야 하는가? 발걸음이 망설여집니다. 만수산 단풍은 절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