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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디딜 틈이 없는 공방 안
발 디딜 틈이 없는 공방 안 ⓒ 송영한
공방에 들어서니 드럼통보다도 훨씬 큰 대북과 나무들, 그리고 각양각색의 원색안료들과 기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다. “아닌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우리나라의 국보급 북들이 탄생했다는 말인가?” 하고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서있는 순간 공방에서 형님과 같이 일하는 훤칠한 용모의 윤 선생 막내 동생 윤권(37)씨가 인사를 건넨다.

차 한 잔 같이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공방을 나와 윤 선생과 환경사업소 정화시설 계단에 앉아 차 대신 담배를 한 대씩 피워 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업 환경이 열악하네요?” 충격을 삭이지 못한 기자의 첫 질문에 윤 선생은 “선친과 함께 이곳에서만 10년이 넘었다”고 말하면서 그 전에 7년은 문화원 지하실에서, 그 이전에는 마석(경기도 남양주군 화도읍)에서 북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그나마 10여년 전 구리시에서 이곳을 무상으로 임대해 줘 고맙게 쓰고 있다면서 “장소가 비좁아 자재창고는 옥상에 움막을 쳐서 사용하고 있다”고 귀띔하고 “민속 공예가들의 형편이 대부분 비슷한 환경일 것입니다만 흙탕물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이 피지 않습니까?” 하고 껄껄 웃어넘긴다.

4대 가업을 이어가는 윤종국(오른쪽), 윤권 형제
4대 가업을 이어가는 윤종국(오른쪽), 윤권 형제 ⓒ 송영한

"30년 전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웠지요"

‘언제부터 북을 만들기 시작하셨습니까?’ 기자의 본격적인 질문에 윤종국씨는 상념에 젖는 듯 파란 가을하늘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말문을 연다.

“북을 만들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려면 아버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며 2년 전 타계하신 고 윤덕진(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63호) 선생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경남 하동에서 1926년에 태어난 아버님은 30대에 이미 조부에게 기술을 전수 받아 유명사찰의 북(法鼓)을 제작하기 시작하여 1984년 구리시에 정착, 2002년 1월 5일 향년 76세로 타계하실 때까지 오직 외길로 북 만드는 일에만 전념해 오셨지요.”

“아버님이 평생 만드신 북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지만 대표적인 북으로는 88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사용된 용고, 청와대 앞 문민고, 정부종합청사 민원실의 신문고, 86아시안게임에 사용된 법고, 줄북, 무용북, 그리고 민속촌의 큰북,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낙산사, 도선사, 신흥사, 봉암사, 백담사, 법흥사 등 전국 유명사찰의 법고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고 윤덕진옹 유작, 구리시청 정문 앞 고구려북. 사신도 중 하나인 주작이 그려져 있다.
고 윤덕진옹 유작, 구리시청 정문 앞 고구려북. 사신도 중 하나인 주작이 그려져 있다. ⓒ 송영한
이어 “구리시청 앞에 고구려북은 제가 아버님과 함께 만든 북이고 또한 한일 월드컵 개막식 때 사용한 600여개의 쐐기북도 저희가 만든 것이지만 아쉽게도 아버님은 월드컵 개막식을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리운 듯 잠시 말문을 멈췄다.

“저희 형제가 8남매입니다. 원래 북에 큰 관심이 없는 큰 형님과 누님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4형제가 아버님의 가업을 이어받고 있는데 신, 일권 두 동생은 따로 공방을 운영하고 있고 막내인 권과 제가 전수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래 북은 2인 1조가 돼야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한 윤종국씨는 “아버님께서는 한국전쟁 때 경찰로 공비토벌에 나섰다가 팔을 다친 국가유공자이셨는데 팔이 부자연스러우니까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 작업하는데 가죽을 잡아주기도 하고, 나무를 잡아주기도 하고 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아버님께서 제가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하나, 둘 비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님은 가르쳐주고 저는 아버님 기술을 뺏기(?) 위해 부대끼며 30년을 지내오다 보니 저도 이제 북 만드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북은 종합예술입니다"

‘북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나요?’하고 공정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종국씨의 두 눈에 다시 생기가 돌면서 막힘 없는 설명이 이어진다.

“북은 세 가지 기술과 더불어 또 하나의 경지를 넘어서야 탄생하는 종합 예술입니다.”

“세 가지 기술이란 가죽을 다루는 갖바치, 나무를 다루는 목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어야 하고 공정의 맨 마지막 경지인 울림통에 가죽을 씌우는 북메우기로 마무리됩니다. 그 때 소리의 음(陰:둔탁한 소리)과 양(陽:경쾌한 소리)을 조율하는데, 북소리를 제대로 아는 귀명창이 되는 데에는 30-40년의 수련을 거쳐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서 “저도 30년 가까이 북을 만지다 보니 이제 겨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말하며 윤씨는 겸손한 몸가짐을 잃지 않는다.

‘지금도 모든 작업을 손으로 다 합니까?’ 기자의 계속되는 질문에 “가죽을 다루는 공정은 아버님 살아 있을 때까지는 손수 하셨지요. 3-5년생 황소가죽을 석회에 담갔다가 계분(닭똥) 물에 우려내어 손수 무두질로 두께를 조정하여 쓰셨습니다”라며 “지금에야 워낙 일손이 달리고 가죽을 다루는 기술들이 뛰어나 납품을 받지만 나머지 공정은 모두 직접 합니다” 하고 말한다.

“북의 소리가 울려나는 울림통은 소나무, 춘향목, 미송, 오동나무, 물푸레나무, 미루나무 등을 쓰는데 보통 대북(지름 6척 이상)은 소나무 등 무거운 나무를, 소북은 오동나무 등 가벼운 나무를 씁니다. 울림통에 쓰는 나무는 보통 2-3년을 잘 말려서 써야 되니 좋은 북이 탄생하려면 최소한 3년은 기다려야 하는 셈입니다.”

"생계를 위해 가업을 팽개칠 수야"

고 윤덕진옹이 생전에 작업하던 전수소 전경
고 윤덕진옹이 생전에 작업하던 전수소 전경 ⓒ 송영한
‘그렇게 만든 북들은 어디로 팔려 나가나요?’기자는 공방 운영의 예민한 문제를 살짝 건드려본다.

“저희는 인증받은 무형문화재 이수자들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직접 관리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소비하는 북들은 대개 조달청을 통하여 저희에게 구매합니다. 문제는 그 양이 아주 적다는 거죠. 생계를 위해서는 학교 등 대량 소비처를 뚫어야 하는데 도무지 가격 경쟁에서 밀려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공정을 기계화한 북에서부터, 이제는 값싼 수입품까지 밀려오니….”

“사실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벌써 다른 직업을 택했을 겁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가업의 맥이 언제가지 이어질지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저희 집안에서 북을 만들어온 지가 저까지 4대째입니다. 한 대에 30년씩만 잡아도 120년이 넘습니다. 그것도 갖바치라는 천민의 딱지를 붙이고 해온 셈이죠.”

“최근 들어서는 우리 전통 공예에 대한 관심도가 높고 우리 것을 지키자는 의식들이 깨어나기 시작해서 다행입니다만 아직도 해결할 숙제들이 많습니다.”

“우선 저희 집안만 해도 이제 5대의 맥을 이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큰아이가 고3인데 전교에서 1-2등을 다투는 등, 공부를 썩 잘해요, 하지만 대학을 나온 뒤 본인이 원하고 소질이 있다면 가르칠 생각입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거나 소질이 없다면 집안에서 소질 있는 조카들을 알아봐야죠. 다행히 8남매나 되니 말입니다” 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일본 같은 데서는 가족 중 소질 있는 이가 없으면 소질 있는 사람을 양자로 입적해서 명인의 가계를 이어나가기도 합니다만….’ 이 같은 기자의 추임새에 “우리나라는 기술전수에 대한 배타성이 아주 강해서 심지어 자기 아들에게도 전수를 안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혈연에 대한 집착도 남다르고요.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다 걷어내야 되겠지요.”

"아버님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겁니다"

큰북을 수리 중인 윤종국씨
큰북을 수리 중인 윤종국씨 ⓒ 송영한
'우리 북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기자는 슬슬 마무리 질문을 던져 본다.

“그렇게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할 일이 있지요. 아버님에 이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제 실력을 더 쌓아야 합니다. 우선 내년 3~5월쯤에 서울 삼성동에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작품전시회를 열 계획이고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아직까지 유일하게 공석으로 있는 북메우기 인간문화재가 되어 아버님 영전에 떳떳하게 바쳐야지요”하고 개인적인 포부를 밝힌다.

“그 다음에 저에게 꿈이 있다면 제가 사는 이곳 구리에 북 만들기 체험장과 전시관을 갖추어 구리 하면 전통북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주나 이천이 도자기로 유명해진 것도 사실 알고 보면 관광객들이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가지고가는 체험코스의 몫이 컸거든요. 구리에 북만들기 체험장이 들어서면 작은 소북이나 장구 등을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자연히 구리시가 홍보 될 것이고 구리의 상징물이 될 수도 있겠지요.”

“더구나 구리는 고구려와 동구릉의 역사 벨트를 조성할 수 있으니 전통공예와 얼마나 잘 어울리겠습니까?”

“전시관 같은 경우에는 의지만 있으면 국비나 도비의 지원을 받아 시 건물로 건립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같은 것은 다 정책을 다루는 분들이 할 일이고….”

“저는 다만 좋은 북을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뿐입니다.”

“수리를 의뢰 받은 대북을 손보아야 한다”며 일어서는 윤종국씨의 뒷모습에서 4대 120여년을 고집스럽게 이어온 장인의 혼과 맥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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