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8월 11일부터 16일까지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파라미타청소년협회와 ㈔우리는선우가 주관하는 '한·몽 청소년 국제친선교류캠프'가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83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한국인 참가자들이 함께 했으며 신원보증을 받기가 어려워 그 동안 국제캠프에 참석하기 힘들었던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청소년 25명도 이번 일정을 함께 했다.<필자 주>

몽골의 전통문화는 '유목문화'이면서, 한편 '불교문화'이기도 하다. 정복의 시대를 거치면서 티베트를 통해 불교를 접한 몽골족들은 급기야 '초원의 전사'가 아니라, '영혼의 전사'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난 70년 동안의 사회주의 통치기간을 거치면서 전통문화였던 불교문화는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 몽골의 국기
ⓒ 김동훈
90년대 개방과 함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되돌아보려는 노력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자본주의와 서구문화 앞에 몽골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몽골불교'라는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몽골 불교문화의 우수성은 더더욱 모른다. 금년 여름 몽골답사를 통해 얻은 정보와 자료들로 그들의 전통문화를 정리해보았다.

몽골의 달라이 라마, '자나바자르'

티벳에서 받아들인 몽골의 불교가 토착화 과정을 통해 '몽골불교'라는 나름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마련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징기스칸'과 더불어 몽골인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자나바자르'에 의해서이다.

'자나바자르'는 대원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럼'에 몽골 최초의 절인 '에르덴조' 사원을 세웠던 압후태쌘 칸(1554-1558)의 증손자로 1635년에 태어났다. 영명한 자나바자르는 어린 시절 티벳의 린포체인 '잡춘다르나뜨'의 환생으로 밝혀져 14살에 티벳으로의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티벳에서 '판첸라마'로부터 계를 받고, '달라이라마'로부터는 '젭춘담바(Jebtsundamba, 聖人)'의 칭호를 수여받는다.

그는 2년 동안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대학자와 수행자들에게 법을 전수 받은 후 티벳 각 종파의 대가들과 천문, 지리, 의학, 언어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로 모여진 600여 명의 승려들을 이끌고 몽골로 돌아오게 된다.

▲ 자나바자르를 조형한 불상
ⓒ 김동훈
몽골로 돌아온 자나바자르는 티베트에서 함께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티벳 라싸의 '간단사'를 모델로 같은 이름의 사찰을 지었으니 이것이 현재의 울란바토르의 '간단사'이다. 그와 동시에 자나바자르는 티벳의 거의 모든 경전은 물론 천문, 의학, 예술 등 관련 분야의 학문서를 번역하기 시작했고, 이때 몽골말로 더 잘 옮길 수 있도록 '소욤보'라는 몽골의 문자를 창제했다.

현재까지도 몽골의 국장은 '소욤보'의 첫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자나바자르는 불교의 의례와 풍습을 몽골식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각처에 대사원들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몽골의 이동 가옥인 '겔'을 응용하여 몽골 특유의 사원건축 양식을 창안했다. 지금도 세계 수준급으로 평가받는 수많은 탱화와 불상을 직접 제작했으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자나바자르의 활동영역은 단순히 불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몽골족 일상생활 전반에 미쳤다. 그는 최소한의 고통을 주면서 깨끗하고 신속하게 가축을 잡는 도살법을 고안하여 가르쳤고, 태어나고 결혼해 아프고 늙어 죽기의 의례들과 인사를 나누고 놀고 즐기는 법에서, 모자의 형태며 옷입는 풍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활풍습을 만들어 보급했다. 더 나아가 종족간 분쟁을 중재하고 귀족들을 모아 국제정세를 논의해 외교정책을 결정하기도 했다.

제1대 '젭춘담바 자나바자르'는 이후 환생을 거듭해 몽골의 마지막 황제 8대 '젭춘담바 복드칸'까지 이어지면서 몽골 역사에 남는 불교지도자이자 몽골 통치자로서 티벳의 달라이라마에 비견되는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현재 9대 젭춘담바는 티벳에서 환생하여 인도에 망명 중이다.

몽골불교는 티벳불교가 아니다

'자나바자르'에 의해 몽골불교의 독자성이 성립되었지만, 그 고유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몽골불교가 '라마교'이자, '밀교'로서 '티베트불교'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실제 몽골 현지의 불교사원들을 둘러보아도 건축양식이나 불구, 경전암송 등에서 몽골불교와 티베트불교의 차이점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몽골에는 이미 13세기에 대장경 전체를 티베트어에서 몽골어로 번역한 역사가 있다. 아시아 전역에 전파된 불교의 범위를 생각했을 때 중국, 티벳에 이어 자국어로 대장경 전체를 번역한 나라는 몽골 정도이다. 우리 나라에서 최근 한글로 대장경이 완역된 것에 비한다면 몽골불교의 독자성은 새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몽골대장경에 따라 몽골어로의 경전독송과 그만의 독특한 음율이 세워졌고, 몽골적인 불교음악이 성립하였다. 또한 탱화나 불상 등에서도 몽골적인 전통들이 보이고 승려복식의 차이와 불교의례에서도 티벳불교와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 에르덴조 사원
ⓒ 몽골과한국
그러나 지난 70년 동안의 사회주의 시절, 40대 이상의 스님들을 처형하고, 사원을 남김없이 불태우며, 불경을 소각하는 한편 불상들을 소련으로 날라 불교의 기반을 없애는 '법란'을 겪은 몽골불교는, 탄압이 완화된 이후에도 살아남은 스님들은 강제로 결혼을 해야했다. 또 다시 복원된 관광용 사찰에서도 몽골어 독송을 금지하고 티베트어 독송만을 허락한다든지 하는 수법으로 정체성 잊혀지게 했다.

사정이 나아진 것은 90년대부터 이다. 개방된 이후로 개인의 종교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불교문화도 다시 복원되기 시작한 것. 그러나 서구에 불교붐을 일으키고 몽골불교와도 계통적으로 같은 티베트불교가 몽골에 들어오면서, 몽골불교가 재차 복원되기보다 티베트불교가 덧씌워지는 현상이 일어나 아직 몽골불교가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

비단 몽골뿐만 아니라 밀교권으로 분류될 수 있는 라다크, 부탄, 시킴 등지에서의 불교전통들이 모두 '티베트 불교'라는 하나의 틀거리 속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세간에 알려진 티베트 불교의 지명도와 영향력으로 그 독자성이 묻혀가는 경우들이 많다.

크게 보아 라다크, 티베트, 부탄, 시킴, 몽골 등으로 묶이는 대승불교권은 각각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용광로 같은 커다란 틀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몽골불교 역시 밀교의 지역성이 구현된 한 갈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인들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몽골불교는 우리가 현재 오해하는 대로 완전히 자신들의 전통을 잃어버린 채 그냥 티벳불교의 복사판으로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