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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칼의 노래> 표지
김훈 <칼의 노래> 표지 ⓒ 생각의나무
2000년대 들어 오랜만에 다시 이순신 붐을 불러일으키는 시발이 된 <칼의 노래>는 소설창작의 방법론에서 확실한 특징을 담고 있는 실험적 장편소설이다. 기왕의 역사소설과는 문체와 서술 방식, 소설에 담아 놓은 작가의 목소리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우선 화자가 '이순신'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화자가 '이순신'인 <난중일기>가 일기문의 형식을 띤 수필이라면, <칼의 노래>는 이순신을 작가의 내면세계로 끌어들여 창조해낸, 혹은 작가가 이순신의 내면 세계로 몰입해 들어가 창조해낸 소설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김훈은 적군의 침입에 맞닥뜨린 해군 장군으로서의 이순신의 고뇌를 치열한 심리묘사로 끌어가고 있고, 그럼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칼과 선조의 명을 받은 이순신의 칼 또는 이순신 자신의 칼을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이순신의 참전은 즉흥적으로 읊은 노래가 아니었고, 발표 이전에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쳐 부른 노래나 마찬가지인 셈으로 그려놓았다.

'부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징비록>에서)거나,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먹었다.'(<난중잡록>)고 묘사되었을 만큼 임진왜란이 만든 상처는 가혹했다. 이런 지경에 한반도 남쪽 해상을 지휘한 이순신의 고뇌는 얼마나 깊고 무거웠을까. 그 고뇌는 <칼의 노래>에 순간순간, 예리한 칼에 묻은 피처럼 참으로 참혹하고 당황스럽게 그려져 있다.

해전 사실은 대체로 <난중일기>를 따른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적혀진 단순함과는 전혀 다른 창조의 모습을 느꼈다. 이순신의 일기와는 달리, 감각적인 문체가 넘치도록 살아 있기 때문에 오히려 버겁고 작가가 자기 멋에 너무 사로잡혀 쓴 게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들 정도였다.

그랬다. 풍경에서도 냄새가 나고, 화자의 머릿속마저도, 가슴속마저도 들여다보인다. 그것은 지나치게 서늘하여, 문득 살을 베이는 느낌이다. 아름다움에도 비린내가 있을까? 시인의 비린내는 어떠할까?

도요토미는 죽기 전에 조선 철병을 명했고, 그의 철수 명령은 이미 조선에 파병된 적의 장수들에게 전달되었다. 적의 육군들은 남해안 육상 기지로 집결했고 수송을 맡은 수군과 전선이 증파되었다.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을 자처했고, 그의 오사카에는 늘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는 천하포무, 네 글자를 칼에 새겼다. (중략) 그의 칼은 권세와 이윤을 아울러 천하를 도모하는 칼이었다. (중략)

히데요시의 칼은 얻을 것이 많았고 나의 칼은 얻을 것이 없었다.'

-김훈 <칼의 노래> 재개정판 제2권 148~149쪽에서

이 심각한 문단을 나는 이렇게 읽는다. '이순신은 권세와 이익에 욕심이 없었다. 이순신은 무사나 장사꾼이 아닌 시인으로서 전쟁을 지휘했고, 마침내 영원한 시인으로 돌아갔다.'

2. '이순신 인간 그리기'와 '원균의 명예회복'

고정욱 <원균> 표지
고정욱 <원균> 표지 ⓒ 산호와진주
고정욱의 <원균>(전2권)은 액자소설의 구성 방식을 택하였다. 이선(李選)이 범에게 물려죽을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준 노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임진왜란 때의 원균과 이순신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노인은 원균의 가신 중 한 사람(이극주)이었던 것이며 그는 철저히 원균의 변호인 역할을 한다.

원균의 전공을 임진왜란 초기부터 그려놓음으로써 이순신이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게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또한 이순신이 남해현 현령과 사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순천 수군 이언호의 보고를 듣고 군관 송한련에게 "이 말이 사실과 같다면 적의 군량을 쌓아 주는 격이 되고, 점점 본도(전라좌도)로 침입하여 오래 머물며 물러가지 않을 것이므로 그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살라 없애라"고 명령한 부분에 관하여 이렇게 써놓았다.

'훗날 초유사로 그곳 가까이 나가 있던 김성일은 이 사건을 보고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은 남해도가 그가 있는 수영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만약 적이 그곳의 양식을 얻어 오래 머무르면 반드시 장차 호남을 침범할 것이라 생각하고, 현령이 바다로 내려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틈을 타서 그의 군관으로 하여금 창고를 모두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현민들과 미조항, 평산포에 있던 많은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현령이 바다에서 돌아와 보니 식량과 무기와 군졸들은 모두 없어지고 다만 빈 성뿐이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보리를 베어 양식을 이어가며 흩어진 군졸을 모아 어렵게 성을 지켰습니다.
-고정욱 <원균> 제1권 232~233쪽에서

이순신도 실수를 할 수 있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이선에게 들려주는 노인의 이야기로 잇따라 이어진다.

'"싸움에서의 승리는 지(智)와 용(勇)의 적절한 조화에서 온다네. (중략) 그런 면에서 본다면 원균과 이순신 두 당대의 명장의 결합은 더 이상 잘 맞을 수 없는 공교로운 결합이었네."
"그렇습니까?"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천지신명이 있어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 준비해 놓은 것 같았네.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조심성에 의한 판단력과 철저한 준비성이 이순신의 장점이라면, 불같은 용맹과 과단성, 두려움 없는 패기가 원 수사의 강점이었네."
-고정욱 <원균> 제1권 292쪽에서

원군(援軍)을 미뤄오던 이순신이 마침내 거북선을 투입하여 승전하는 장면에선 왜군을 상대로 원균과 이순신이 손을 굳게 잡은 듯, 통쾌한 웃음마저 터져 나올 정도다.

'왜장의 명령에 따라 장도를 든 날렵한 왜군들 수십 명이 높은 층각선 갑판에서 띠풀 덮은 거북선 위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 순간 벌어진 거북선 위에서의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발바닥을 뚫고 발등으로 올라온 못에 왜군들은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엎어졌다.' -고정욱 <원균> 제2권 55쪽

그러나 죽은 적의 목을 누가 더 많이 베느냐 하는 문제와, 선조에게 '전과(戰果)'를 알리는 장계의 이해(利害) 문제 때문에 두 사람의 갈등은 결국 심화되어 간다.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원균의 전사(戰死)로 다시 이순신으로 바뀌었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원균은 전쟁에서 모두 죽었다. 한 사람은 전쟁에서 지고 죽었고, 한 사람은 전쟁에서 이기고 죽었다. 한 사람은 승장이고 한 사람은 패장이다. 그러나 작가는 단지 그 단순한 공식만으로 역사의 인물을 보지 않았다.

고정욱은 <원균>을 통하여 '이순신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작업'과 '원균을 복원시키는 작업'을 동시에 치러냈다. 그가 난관에 부딪힌 것은 원균에 관한 기록의 빈곤이었다고 했다. <원균>에 액자 바깥의 인물로 등장하는 후대 사람 이선이 아주 상세하게 원균의 행적을 기록한 <원균전>을 썼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작가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한쪽은 철저하게 자료가 보존되고 한쪽은 철저하게 자료가 없는데서 나는 원균의 자료는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리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조차도 그의 실수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날 수 있는 시기의 것들은 전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런데 그 일기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뭉텅이로 몇 달씩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순신을 전승의 완벽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훗날 이순신의 친필 초고를 가져다 누군가가 그에게 누가 될만한 부분이기에 찢어냈을 확률이 가장 높다.'

원균의 후손들이 잘 보존하여 현전하고 있는 교지에는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선무일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강토와 민족의 운명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두 주역이었던 이순신과 원균의 삶과 죽음에 얽힌 진실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 애쓴 이재범(1987년 타계)의 <원균을 위한 변명(기록을 남기지 않은 자의 비애)>(학민사 펴냄)를 보면 <선조실록> '선조 37년 6월 25일조'에 이렇게 나와 있다고 밝혀놓았다.

'이순신·원균·권율은 모두 혈전의 공이 있다. 그때 세 장군은 모두 조금씩 실책이 있었으나 그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는지라 그 세 장군을 함께 책록함이 가하다.'

박종화 <임진왜란> 표지
박종화 <임진왜란> 표지 ⓒ 달궁
그런데 '역사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온 박종화는 대하소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자살로 대하의 끝을 맺고 있으며, 선조의 '선무 일등공신' 판정을 이렇게 달리 해석해 놓았다.

'더욱이 통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마당에 이순신도 1등 공신이요, 패군지장으로 나라와 몸을 망쳐 버린 원균도 똑같은 1등 공신이라고 판정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서인과 북인들이 임금에게 우겨대서 유성룡의 벼슬을 깎아 버리고, 이순신 장군과 원균을 똑같이 1등 공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박종화 <임진왜란>(1957년작, 2004년 달궁 펴냄) 제10권 280쪽에서

한편, 1932년 초간본을 중심으로 작품 속의 각종 표기와 내용을 현대인이 읽고 이해하기에 편리하도록 가급적 현대어로 풀어썼다는 이광수의 <이순신>(2004년 청포도 펴냄)을 보면,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 이렇게 적어 놓았다.

'순신의 유해는 고금도 본영으로 돌아갔다가 아산 선영에 안장하였다. 순신의 상여가 지날 때에 백성들은 길을 막고 통곡하였다. 왕도 어려운 한문으로 제문을 지어 조상하고 우의정, 선문 공신 일등을 책하였다. 원균(元均)은 삼등이었고, 권율이 이등이었다.'

역사 속의 같은 인물을 그리더라도, 작가가 살고 있는 환경이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독자에게 화두를 던지려는 뜻이 어떠한가에 따라 소설은 이렇게 서로 낯선 모습으로 독자 앞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을 자주 그려 넣어 재미를 적절히 버무린 박종화의 박학한 유창함도 좋고, 고정욱이 시도한 낯선 다가섬은 힘차고 쾌활하여 좋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성웅 이순신이 그립건 인간 이순신을 만나고 싶건, 그걸 선택하는 건 어차피 독자의 몫이 아닌가.

3. 기존 역사소설의 관습 깨뜨리기

김탁환 <불멸의 이순신> 표지
김탁환 <불멸의 이순신> 표지 ⓒ 황금가지
네 권 분량의 <불멸>을 개작한 김탁환의 대하소설 <불멸의 이순신>(전8권)은 박종화의 <임진왜란>이 임진왜란이 시작될 징후부터 보여주고 있는 데 비해 조산 만호 이순신 시절의 발단부터 어릴 적 이야기로 되돌아가 전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구성에서 크게 다르다.

그리고 이순신이 원균더러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부터 '형' 또는 '형님'이라 불렀다는 점도 색다른 허구적 설정이다. 이렇듯 시작부터 김탁환은 기왕의 조선 역사소설의 관습을 깨뜨리고 풀어갔다. '민족적 우월성을 논하는 일이나 각 가문의 논공행상은 처음부터 관심 밖'이었고, '이겼으니 위대하고 졌으니 비겁하다는 동어반복은 위인전의 몫'으로 밀쳐두었다. 작가가 <불멸의 이순신>을 쓰는 데 신경 쓴 것을 '작가의 말'에서 살펴보면 네 가지라고 한다.

'먼저 나는 16세기 개혁세력인 사림파의 고난과 승리라는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순신의 삶을 조망하였다. (중략)
또한 전쟁이 이 세계를 얼마나 타락시키고 또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이려 하였다. (중략)
그와 함께 조정과 전장을 병치시켜, 정치의 영역과 전투의 영역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엇갈리는가 탐구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당시 왜 수군이 조선 수군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맞아 싸웠는지도 복원하려 하였다.'

이광수 <이순신> 표지
이광수 <이순신> 표지 ⓒ 청포도
특히 마지막 관점에 관하여 작가는 "독재 정권 시절 임진왜란을 바라본 구도는 조선 조정의 당파싸움 및 수군 내부의 쟁공과 반목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적이었던 왜군에 관해서는 거의 주의를 두지 않았다.

조선 내부의 추악한 정쟁이 두드러지는 반면 왜 수군의 장수 이름은 하나도 모르는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대립 구도 대신 이순신 대 이순신을 모함하고 핍박한 장수와 대신들을 대립 구도로 택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서부터 비롯된 것"
이라고 강조해 놓았다.

이러한 기존 소설에 대한 비판의 시선은 "조선 후기에 전해 내려오는 딱지본 고소설들에도 하나같이 원균은 영웅의 일생을 사는 이순신을 괴롭히는 숙적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춘원 이광수까지 그의 작품 <이순신>에서 원균을 역시 악인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원균>의 '작가후기'에서 강조한 고정욱의 시각과 비슷하다. 또한 이순신 겉의 '영웅'보다 이순신 속의 '인간'을 찾으려고 한 점, '이순신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끊임없는 성장의 나날로 조망'하려고 한 점 역시 <원균>에서의 고정욱의 시각과 비슷하다.

여기에 고정욱의 <원균>과 다른 것이 있다면 '원균의 복원 또는 명예회복'보다도, 신립, 이일, 원균처럼 기존의 관습을 따랐다가 대패했던 것과 달리 '한계 상황 속에서 다시 홀로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한 새로운 근심을 시작'하는 이순신이기에 그를 통하여 '관습에 젖은 장수들을 용서하는 거대한 화해'를 그려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광수의 <이순신>을 펴낸 청포도에서는 '일제시대인 1932년에 창작되어 오늘에 이른 이광수의 <이순신>이야말로 진정한 이순신의 참모습을 그린 최대의 고전'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박종화의 <임진왜란>을 보면 김탁환의 주장과는 달리 일본의 상황과 왜 수군의 이름 등이 상세히 서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류성룡의 실각'과 더불어 '이순신은 끝내 쿠데타의 유혹을 뿌리치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 관음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고 그린 김탁환의 시각을 바라보면서, 문득 박종화가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이 "7년 임진왜란은 이제야 끝이 나는구나! 나도 임진왜란과 함께 가야 한다" 하고 외친다거나 '아아, 때가 왔구나. 내가 스스로 가는 길을 취할 때가 왔구나!' 생각하고서 방패를 치우고는 왜군의 총탄을 일부러 맞아 자결하는 것으로 그린 장면을 떠올려 본다.

<임진왜란>의 '에필로그'라고 할 만한 부분에서 박종화는 "만일 경천위지하는 재주와 보천욕일하는 큰 공로를 세운 이순신 장군이 그대로 이 틈에 살아 있었더라면 장군은 얼마만한 모함과 박해와 곤욕을 당했을는지 몰랐을 것이다"라고 예측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김탁환은 '쿠데타의 유혹을 뿌리친 것'으로 이순신의 고뇌를 표현함으로써 정치군인이 아닌 쪽으로 가는 이순신의 모습을 그려냈으니, 이것 또한 군사 쿠데타가 없던 시절에 나온 작품(박종화의 '임진왜란' 1957년)과 군사 쿠데타가 두 번이나 일어난 뒤에 나온 작품과의 사이에 놓여진 '거리 간격이 제공하는 한 가지 변화'일 수도 있겠다.

정말 궁금하다. 조정의 무능과 그릇된 공격 명령을 대하면서, 이순신은 어느 순간에 '군사 쿠데타'의 유혹을 과연 느꼈을까?

칼의 노래

김훈 지음, 문학동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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