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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만이었다. 우리 다섯이 한 자리에 모인 게.

오래 전 우리는 한 신문사에서 함께 활동했다. '건전한' 비판 의식을 지닌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그 신문사는 월급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월급은 고사하고 인쇄비, 사무실 운영비, 하다못해 쓰레기봉투 값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했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시간이었다. 2001년 여름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그곳을 떠났고 몇몇은 남았다. 2년여 시간이 흐른 2003년, 그 신문사는 폐간을 결정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도시 생활에 몸을 상한 친구는 낙향을 결정했고, 평생 프리랜서로 살 거라던 친구는 직장을 잡았다. 마감이면 며칠씩 밤을 새던 사무실까지 처분한 다음 우리는 마지막으로 인사동에서 만났다. 몇몇 선배와 지인들과 함께 맛나게 냉면을 먹고 인사동거리 한복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찰칵!" 그렇게 우리의 한 시절을 떠나보냈다.

"타로 카드 점 보러 가는 거 어때?"

▲ 타로카드. 출처: <상징의 비밀> (문학동네)
그리고 2004년 시월의 마지막 날, 서울 신촌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낙향했던 친구가 서울로 올라 온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동안 얼굴을 전혀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섯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색함 때문이었을까,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함께 본 영화는 실망, 그 자체였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아서 신촌을 헤매야 했다. 결국 들어간 음식점의 맛과 서비스는 최악이었고 종업원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친구의 허벅지에 뜨거운 차를 쏟기까지 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타로카드 점 보러 가는 거 어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고 순간 우리는 "그래, 좋아"라고 답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타로카드 점은 질문을 하나 던진 다음 타로카드를 뒤집어서 나온 점괘를 읽어 점을 본다. 타로는 통계에 근거하거나 혹은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을 예언하는 게 아니다. 점을 보는 사람이 직접 카드를 뽑고 점괘 또한 '열린' 가능성 정도로 여긴다. 흥미진진한, 약간 영험한 카운슬링 정도라고 할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대 앞 타로카드 카페를 찾았다. 유일한 남자였던 한 친구는 고시생답게(?) 앞날에 대해 궁금한 게 없다고 해 결국 여자 넷만 카페의 사장 아저씨에게서 점을 봤다.

"빨리 회사 때려 치세욧!"

"그곳에 계속 있으면 발전이 없어요. 봐요, '장님'이잖아요."

직장 문제로 고민하던 동갑내기 친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더니 사장 아저씨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가 뒤집은 카드에는 눈을 가린 장님이 그려져 있었다. 암울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카드에 친구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월급쟁이말고 평생 프리랜서로 살고 싶어하는 그 친구는 사진을 좋아한다. 바쁜 직장 생활에도 강좌를 들으며 사진을 배웠고 만 서른이 되기 전에 기필코 외국에 나가 사진 공부도 하고 세계여행도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불안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만으로 서른이면 한국 나이로 서른하나, 서른둘인데 그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지금 직장에서 월급이나 받으며 조용히 살까 등등 소심함이 그녀를 흔들기 시작한 거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타로 카드가 번갯불을 때려 준 거다. 빨리 뭔가 시작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낭비하게 될 거라고. 아저씨가 "해외에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너스 덕담까지 하니 친구 입이 찢어진다. 그런데 사족 하나. "양자리에게 사랑은 사치에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싱글즈> 동미의 운명을 선고 받다!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을까요?" 나보다 한살 어린 스물여덟살 여자 후배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지금껏 연애 한번 하지 않은 게 틀림없는 그 녀석은 오랫동안 결혼이 필요없다고 생각해 왔단다. 다들 피해 간다는 기관의 출입기자로 있는 그녀에게 분명 결혼은 '필수'보다는 '선택'처럼 보인다.

카드가 뒤집어지고 이런, 조개 안에 '진주'가 들어 있다. "결혼하는 게 좋겠네요. 자식이 있는데요." 똑같은 카드가 2장이나 나왔는데 아저씨 말이 물고기자리는 결혼하는 게 좋단다. 결혼 생각도 없는데 자식이 있다고, 이걸 어떻게 해석해나? "너, (영화 <싱글즈>의 동미처럼) 싱글맘 될 건가 보다." 순간 좌중은 깊은 침묵에 빠져 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키워 줄게." "……언니, 진짜죠?" "응." "……."

그렇게 후배의 미래는 '싱글맘'이 되어 버렸다. 자식이 생기면 낳아서 잘 키우면 된다, 그리고 꼭 결혼해야 자식을 낳는 건 아니다. 우리는 철딱서니 없게도 그렇게 결론내렸다. 한국 사회에서 <싱글즈>의 동미와 나난처럼, 혹은 <안토니아스 라인>의 여자들처럼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결혼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을 억지로 등 떠밀고 싶지는 않았다.

스물아홉에 집에서 기어 나오려고 하다

▲ 타로 카드 '전차' 출처: <상징의 비밀> (문학동네)
다음은 내 차례. 스물아홉 해 동안 부모님에게 기생하다가 이제 독립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냐고 물었다. "집 나오는 게 좋겠네요." 난 '게자리'인데, '전차'가 상징이란다. 앞만 보고 돌진하는 전차,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한단다. 첫번째 카드, 신기하게도 부모님이 그려져 있다. "부모님이랑 사이 나빠서 나오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어요. 만약 불화가 있다면 풀고 나오면 되구요."

나의 당면 과제는 '독립'이다. 허튼 짓 하느라 모아둔 돈도 없고 혼자 사는 외로움을 견딜 만큼 씩씩하지도 않지만 한동안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혹은 영영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후로 나는 '독립'을 결심했다. 혼자 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혼자서 밥 먹기, 혼자서 놀기, 혼자서 행복하기 등등.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쯧쯧, 니가 고생을 안 해 봤구나"라거나 "비굴(?)해도 부모님이랑 사는 게 돈 버는 거야"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초반 심리전에서 밀리고 있던 나의 독립 투쟁에 타로카드가 전차 같은 힘을 주고 있었다.

혹시나 "외로워서 힘들지 않을까요?"하고 물었더니 아저씨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게자리에게 외로움은 필수죠!" 오, 게자리는 외로운 운명~.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사는 게 바로 나라는 전차의 운명이란다.

우리의 삶이 타로카드의 점괘를 따라 갈까?

그렇게 우리는 실질적인 '비혼(결혼을 '아직' 안한(未婚) 게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非婚) 그대로의 상태)'을 선고받았다. 마지막 남은 후배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최근 실연한 다섯살 아래 여자 후배에게도 역시나 "사랑은 사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신 지금 다니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어떻게든 방송국에 들어가서 카메라 앞에 서라고 했다. TV 기자가 아니더라도 MC, 리포터라도 하란다. 원고지에 끄적거리는 것보다는 몸으로 보여 주는 게 맞는다나. 우연처럼 후배는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내년까지는 방송국 시험을 볼 수 있는 나이다.

결국 우리 여자 넷은 '비혼'이라는 냉엄한 운명과 마주서야 했다. 하지만 슬프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하나는 사진 찍으며 세계일주하고, 한 사람은 아이와 함께 따뜻한 삶을 꾸리고, 한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 끼를 뽐낸다고 하지 않는가. 빌빌거리고 있는 나도 전차처럼 밀어붙이며 살 거라고 하니 바로 우리가 원하던 삶, 그 자체였다. 흡족해진 우리는 보무도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사진 공부하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성'을 주제로 하는 조그만 사진 공모전에 응모했는데 가작에 당선됐다는 거다. 벌써부터 타로 카드의 영험함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싱글맘' 후배는 그럼 자기는 어쩌라고, 키워 주겠다는 말을 녹음할 걸 그랬다며 농담을 했다.

과연 우리 여자 넷의 삶이 타로카드의 점괘를 따라 갈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친구가 없는 시간 쪼개서 사진을 배운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머지도 타로카드에서 자기가 원하던 점괘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싱글맘' 후배는 특유의 진득함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고 다른 후배는 새벽 같이 일어나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타로카드에 영험함을 부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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