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초당에 오르는 길은 많이도 변했다. 초당을 찾은 것은 지난 95년 여름 이후 두 번째다. 정류장에서 마을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농가에서 키우는 닭들이 보이고, 대나무도 보이는 시골마을의 풍경이 있었으나 이제는 관광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마을의 끝자락에는 찻집과 식당이 들어서고 새로 건물을 짓는 공사도 한창이다. 하긴 정약용 선생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고, 남도 여행을 하는 사람치고 다산초당을 빼놓는 사람이 없을테니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세월에 대한 나그네의 섭섭함이 담긴 심술은 어쩌지 못하겠다.
나는 산의 초입에 있던 찻집을 찾았으나 폐가가 되었다. 그 집 안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하긴 "지아비와 자식새끼 데리고 잠시 쉬었다 갑니다"와 같은 문구가 있던 그 방명록을 읽어가며 차를 마시던 친구들도 세월의 그림자만큼 참 많이도 멀어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찻집을 운영하던 이는 해남윤씨 문중 사람으로 집에다는 공부를 한다고 거처를 마련해 놓고는 어느날부터 찻집을 열어 집안에서 혼이 난 이후 빈집이 되었다고 한다. 초당을 찾는 나그네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하며 말벗이라도 되었던 그 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폐가가 된 찻집을 둘러본 나는 초당으로 향하는 산길을 올랐다. 돌계단 주위로 대나무, 삼나무, 소나무, 동백나무가 조화롭게 울창하다. 이 길은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조금 더 오르면 10년 전 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이며 조금 더 오르면 200년 전 정약용을 만날 수 있는 세월의 길이다.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10년 전 내 발걸음을 좇아가고 있다. 앞으로 가고 있는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호흡을 느낀다.
강진으로 유배되어 주막집 노파의 뒷방, 대흥사 말사인 고성사, 제자 이청의 집에서 기숙하던 정약용은 유배 8년째가 되던 해에 다산초당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유배가 풀린 1818년까지 10년 동안 기거한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로 정약용은 해남윤씨의 먼 일가가 된다. 초당은 원래 귤동마을 해남윤씨인 윤단의 초당으로 그의 아들들이 정약용을 초빙한다. 귀양살이가 여러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주위에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숲이 울창한 가파른 산길이 좀 지루하다 싶으면 다산초당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산(茶山)은 차나무가 많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정약용은 초당의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주로 동암에 기거하였으며 서암에는 제자들이, 초당은 서당으로 사용하였다.
초당 앞으로는 넓은 바위가 있다. 어릴 적 소꿉장난이나 딱지치기를 하던 앞마당 바위처럼 자리하고 있다. 가끔 방문객들이 걸터앉기도 하는 그 바위는 정약용이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부뚜막이다.
초당의 서편으로는 샘이 있으며 샘 뒤편 바위에는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긴 바위가 있다. 동편으로는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들고 네모진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 뒤에는 꽃나무를 심었고 초당과 서암 사이에도 단을 쌓고 채소를 길러 먹었다. 단아하고 곧은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초당, 동암, 서암은 모두 초가지붕이었으나 폐허가 된 옛 터에 초가대신 기와를 얹어 복원한 것이다. 초당에 걸린 '茶山草堂', 동암의 '寶丁山房' 현판은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으로 '다산초당' 현판은 집자를 한 것이고,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직접 쓴 것이다. 동암에는 '보정산방'외에도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있다.
동암 앞을 지나치면 봉우리를 넘어 백련사로 이어지는 숲길이 펼쳐진다. 백련사로 가는 숲길은 혜장선사와 정약용이 유불(儒佛)의 선을 넘어 학문과 사상, 정을 나누던 길이다. 백련사에 기거하던 혜장선사를 만난 것은 읍내 주막집에서 기거했을 때로 대화할 만한 상대도 학문을 나눌 상대도 없던 시절이다.
혜장을 통해 학문적 자극과 공허함을 메우고 차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초의(草衣)선사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혜장선사는 정약용보다 열 살 연하로 불교는 물론, 다도와 유학,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혜장 선사에게 다도를 배운 후 유배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으리라.
혜장선사와의 인연이 있는 백련사 가는 숲길 입구 산마루에는 정약용이 구강포 앞바다와 흑산도로 귀양 가 있던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며 바다를 내다보던 곳에 천일각이 서 있다. 천일각은 정약용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외로움을 달래던 터에 근래 새롭게 세운 누각이다.
신발을 벗고 천일각에 오르니 넓게 펼쳐진 바다의 시원함처럼 답답하던 마음 또한 탁트임이 느껴진다. 잠시 시선과 마음을 고정한 채 그 자리에 있자니 "어화둥둥 내 사위야~"로 시작하는 노래 가락이 흘러든다.
내일이면 사위가 오는데 얼른 보고 싶다고 하는 광주서 온 아주머니의 노랫가락이다. 오랜만에 보는 사위도 저토록 반가울 것인데 귀양길에 헤어져 평생 만나지 못했던 정약용, 정약전 형제간의 애틋함은 어땠을까?
전에 가보았던 찻집에 대한 추억이 너무 깊어 초당 내려오는 길에 새롭게 생긴 찻집을 찾아 차 한잔을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름이 생기는 것은 지난 날 차와 인정을 팔던 찻집이 그리워서 이며, 친구들과 함께한 그 여행길이 추억되어서 그러하며, 또한 옛사람이 그리워서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