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10월 두 차례에 걸쳐 민주주의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 여파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은 채 한달이 지난 지금 다시 국회를 강타하고 있다. 헌재의 논란에 불을 다시 지핀 건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의 '사법쿠데타' 발언이었다. 그는 지난 12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10월21일은 '사법상국'(司法傷國)의 날이었습니다. '정치 헌재', '수구 헌재'가, 그 결정에 대한 찬반과 관계없이 국민과 국가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날입니다. 국민과 국회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한 ‘사법쿠데타’였습니다."
발언 이후 이 의원은 당 안팎에서 거센 비난과 비판 세례를 받아야 했다.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문란케 했다는 죄명도 따라붙었다. 특히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이 의원을 향해 "헌재를 무시하고 헌법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냐, 한마디로 나라를 허물겠다는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신성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절대선'이라는 사실을 반복해 부각시키며 헌법에 가해질 수 있는 근원적 질문의 꼬리를 '싹둑' 자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 정치인의 이같은 분노는 이미 200년전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약 200년 전 매디슨을 중심으로 한 미국 연방주의자들이 사법부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의 헌법을 제정하려 할 때 이른바 반연방주의자 집단이었던 브루투스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헌법에 관련된 모든 것으로 사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헌법안은 법원에 무한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사법부의 권력은 입법부의 권력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이들의 비판의 핵심은 헌법이 법원에게 사법권이 적절한 영역을 벗어날 수 있게 허용함으로써 입법적 기능을 행사할 것이며 결국 사법부는 통제불능의 권력이 될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였다. 약 20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지만 브루투스의 우려와 이목희 의원의 '격문'은 마치 각본으로 짜여진 듯 전후가 딱 들어맞는다. 브루투스의 예견이 지금 미 헌법을 모태로 하고 있는 한국에서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목희 의원의 '사법쿠데타' 발언은 200년전부터 예견됐던 일
| | | 매디슨적 민주주의란? | | | | 최장집 교수의 논문 '민주주의와 헌정주의 : 미국과 한국'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매디슨적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의 과다함을 우려하고 다수의 지배(민중의 지배)를 견제하는 것을 골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이념형을 뜻한다.
이는 미 헌법제정회의에서 연방헌법의 입안과 비준에 영향력을 행사한 제임스 매디슨이 '어떤 통치체제를 건설해야 할까'라는 자문 속에서 도출된 민주주의 이념형이기도 하다.
매디슨적 민주주의는 인구비례에 관계없이 한 주에 2명의 상원의원을 낼 수 있도록 한 비민주적 상원의원 선출방식과 대통령 선거인단제도라는 전세계적 조롱거리를 미국의 헌법에 제도화시켰다.
헌법수정을 어렵게 하는 헌법 조항, 양당제를 만들어내는 다수대표 선거제도 등도 매디슨적 민주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 | | |
그 부활은 앞서 언급했듯 이미 예견됐던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미국 헌법을 모델로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대표적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 민중의 지배를 견제하기 위해 탄생한 매디슨적 민주주의가 미국 헌법이라는 제도적 틀로, 이어 한국의 헌법으로 스며들었기에 앞뒤가 들어맞았던 것이다.
한편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최근 간행된 <미국헌법과 민주주의> 한국어판에서 장문의 서문을 통해 이같은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최 교수가 먼저 주목하고자 했던 바는 매디슨적 민주주의의 뿌리에서 탄생한 미국 헌법과 그것을 이식받은 한국 헌법간의 인과관계였다.
최 교수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동의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터다. 평소 헌법이 법학이 아닌 정치학의 영역이라고 강조해왔던 그는 마침내 헌법을 정치학의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메스를 들기에 이른다.
최장집 교수, 제왕적 헌재 역할에 메스 들이대다
최 교수의 서문은 미국 헌법이 구현하고 있는 매디슨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부터 출발과 민주주의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최 교수는 글의 본격적인 전개에 앞서 자신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제도적 양태가 어떠하든 민중적 동력이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지속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매디슨적 민주주의와 최 교수의 관점이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 교수 자신이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로 평가하는, 그리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골간이랄 수 있는 "민중 스스로의 통치"를 매디슨적 민주주의는 견제하려 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최 교수의 이러한 관점은 곧 '한국 민주주의의 제약조건'이 돼 버린 우리 헌법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한국 헌정사를 차곡차곡 정리한 뒤 한국 헌법 안에서 움터왔던 매디슨적 민주주의의 요소를 드러내 보인 그는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입안된 우리 헌법이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대한민국 헌법, 두 가지 치명적 결함 지녀"
첫번째 결함은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상호견제에 의한 갈등으로 인해 정치와 정부 기능이 교착과 마비상태로 빠지는 것이요, 두번째 결함은 사법 기능의 역할, 특히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엄청나게 비대해졌다는 점이다. 이는 "권리중의 권리"라는 국민참여 배제와 논의 과정의 부재라는 현상이 '문화적 전통'처럼 반복돼 온 탓이라고 최 교수는 진단했다.
최 교수가 지적한 이 두가지 치명적인 결함은 결국 정부의 무능력을 심화시킴과 동시에 정치의 탈정치화를 가속화시켰고, 국가보안법이나 탄핵, 신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헌재의 판결처럼 정치적 결정을 낳는 사례를 증가시켜 민주주의가 제약을 받는 불행한 사태를 불러왔다. 후자는 곧 '제왕적 사법부'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특정 정당이 쟁점이 되고 있는 법안에 대해 입버릇처럼 위헌소송을 제기하며 입법권을 '자진 박탈'하는 2004년 한국정치의 현실을 겨냥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최 교수는 '제왕적' 헌재의 최근 결정내용을 "민주주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후견주의의 표현"이라는 로버트 달의 개념에 원용해 논평할 정도로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평가를 위해 그의 지적 잣대는 지난 5월의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 및 10월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위헌 결정 등 두 사례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 5월 탄핵 기각 당시 중앙선관위가 대통령을 공무원법 9조가 정의하는 공무원으로 해석하고 헌재가 이를 인정하는 것은 "대통령직을 공무원의 역할로 한정시키는 동시에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광범한 정치적 역할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이라고 최 교수는 말한다. 이는 곧바로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전 과정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정면 비판으로 이어졌다.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은 '사법부에 의한 정치적 결정의 대표적 사례'
지난 10월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에 대해서 마찬가지였다. 최 교수는 헌재의 이 위헌 결정을 "사법부에 의한 정치적 결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규정했다. 나아가 "민의의 대표기구가 내린 다수의 결정을 번복한 것으로, 헌재 결정의 비민주성과 입법부에 대한 사법부의 우위를 입장하는 사례"라고도 했다.
최 교수는 "여야가 압도적 다수로 동의한 정치적 결정과정을 거쳤고 이에 앞서 대선 과정에서 유권자의 직접투표에 의해 합법적으로 위임된 사안임에도 헌재가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은 민주주의의 규범과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헌재의 위헌 결정을 '비민주적'이라고 단정했다. 이는 "탄핵기각 칭송했던 대통령이 이제 와서 헌재를 비난하느냐"고 열을 올렸던 보수적 정치엘리트들의 비아냥거림 섞인 해석과는 차원이 다른 주장이다.
그렇다고 최 교수가 항상성·헌정주의·보수파로 표징되는 매디슨적 민주주의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매디슨적 민주주의도 충분하지 않고 민중적 민주주의만으로도 되지 않으며 민주주의는 두 가지 이념형의 동태적 균형(dynamic equilibrium) 위에서 존립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의해 양자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지는 상태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헌법이라는 '수단'이 민주주의라는 '목적'에 우선해서는 안돼
이같은 그의 민주주의관, 정치관이 한국정치에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헌법이라는 '수단'(헌정주의 혹은 매디슨적 민주주의)을 민주주의(민중적 민주주의)라는 '목적'에 앞세우지 말고 두 모순적 요소의 균형적 결합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두가지 이념형의 동태적 균형점이 발견될 수 있다는 뜻이다.
21세기 한국이 처한 현실처럼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작동이 멈춰버린 '좋은 정치'의 복원은 필수적이라고 최 교수는 누차 강조한다. 좋은 정치의 복원은 헌법이라는 제도 자체에 신앙적 믿음을 보내는 보수세력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빈약한 이해로 구호만 외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개혁세력의 각성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번역서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에 담긴 최 교수의 장문의 서문 '민주주의와 헌정주의 : 미국과 한국'은 "헌법재판소를 누가 감독할 것이냐"라는 유의미한 질문에서부터 "우리 헌법은 과연 민주주의적인가?"라는 '파괴적' 질문까지 우리 스스로 학습해 파헤쳐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은 민주주의의 제3세계로 퇴락하고 있는 미국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선진민주주의 국가로 도약할 것이냐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