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오태양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성동구치소입니다. 병역법을 위반하여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오는 11월 17일 항소심 선고공판을 앞두고 이 글을 띄웁니다. 이렇게 서신으로 인사드리게 됨이 송구스럽지만, 번거로우실지라도 꼭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가난했지만 꿈 많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선물하고픈 마음에 서울교육대학교에 진학했었습니다. 대학초년부터 학생회활동과 사회활동에 몸담게 되었고, 97년 무렵에는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어떻게 해서든 살리자’는 취지로 전개된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제게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평화적인 운동방식의 가능성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수행공동체인 정토회를 통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감되기 직전까지 정토회에서 실무자로서 공동체생활을 하며, 환경·평화·인권·통일·제3세계복지활동 등의 다양한 NGO활동을 했었습니다.
제가 ‘어떤 형태로든지 군사훈련을 이수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반 전인, 2001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군입대 문제를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불교수련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체계적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와 명상을 통해 제 삶이 수많은 생명들과 이웃들의 희생과 고통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들,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며 가졌던 적개심,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갈등과 부조화, 그리고 눈 먼 전쟁과 분단시대로 인한 우리 민족의 고통과 아픔. 갈등과 폭력으로 희생된 수많은 생명들의 아픔이 느껴졌고, 그 원인과 핵임이 제게도 있으며, ‘더 이상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뼈저린 각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련이 끝나면서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일에는 결코 참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 약속을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노라고 스스로 서약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사격·총검술·무기조작 등과 같은 일련의 군사훈련은 인명을 살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제게는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사람의 불자이자 동시에 이 나라의 국민이었습니다. 원칙과 현실, 믿음과 의무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제게는 참으로 수없이 많은 번뇌와 갈등이 있었지만, 종교인으로서의 원칙과 믿음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범법자가 되어야 하고, 사회적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 기도와 명상을 하며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이웃과 세상에 잘 쓰이겠습니다’라고 생의 다짐을 합니다. 이 다짐은 ‘불이익을 받더라도 생명을 훼손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을 자유’와 더불어 ‘이웃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봉사할 책임’을 의미합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20대를 시작하며 30대에 이른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웃과 세상을 위해 일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봉사의 길이 희생이 아닌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길임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바람은 이 두 가지 믿음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 우리사회에 제시되는 것입니다.
현재 17대 국회에서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골자로 하는 ‘병역법개정안’이 발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실로 꿈만 같았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저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에게는 감옥 말고는 어떠한 다른 길도 존재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에게는 삶의 희망이 되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우려와 불안의 소식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다종다양한 국민들의 견해와 입장을 수용해야 하는 의원님의 입장에서는 이 법안과 제도의 심의가 매우 곤란한 사안일 것이라고 사려됩니다.
저는 ‘대체복무제도’가 또 다른 특혜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제도가 ‘특혜’가 된다면 저는 수용할 의사가 없으며, 특혜를 누리고자 하는 추호의 의지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체복무제도가 ‘또 다른 징벌’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제도가 ‘징벌’로서 주어진다면 그것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본의를 왜곡하는 것이며, 평화와 봉사의 참 뜻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군복무가 신성하고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지듯이, 어려운 이웃과 소외받는 약자들을 위한 대체복무 또한 충분히 가치 있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의원님, 대한민국은 어느 선진국 못지않게 ‘민주주의와 인권’발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역사발전의 이면에는 무모하리만치 열정적이며 진취적이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도전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될 경우 다소간의 논란과 부작용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원천봉쇄할 만큼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100년 전부터, 때론 전쟁의 시기에, 우리처럼 분단의 불안정한 조건하에서도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여, 국가안보와 부정비리, 사회적 형평의 훼손 등의 큰 혼란과 부작용 없이 추진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역사적 선례를 대한민국도 충분히 받아들일 토양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초기의 시련과 어려움은 있겠으나 과감히 첫 씨앗을 뿌려봄은 어떨는지요.
한국사회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존재했던 지난 반세기 동안, 1만명이 넘는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감옥뿐이었습니다.
의원님, 이제는 저희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제가 먼저 앞장서서 멋지게 해 보이겠습니다. 이 제도를 통해 국가인권지수를 향상시키고, 사회복지의 인프라를 풍요롭게 하며, 국민인권보호의 상징적 제도가 되어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격려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소중한 씨앗을 일구어 보겠습니다. 비록 총을 들 수는 없지만,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함께 하겠습니다.
제가 머무르고 있는 성동구치소에서만도 100여명의 젊은이들이 저와 같은 이유로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구치소업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들을 매우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체복무제도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산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현재 700여명의 병역거부자들이 전국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고, 앞으로도 매일 5명꼴로 감옥을 향하고 있어, 올 연말이면 1100여명의 병역거부 전과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번 국회를 통해 대체복무제도가 개선된다면 많은 젊은이들이 전과자의 멍에를 벗고, 우리사회 공동체 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원님,
저는 앞으로 남은 교도소 생활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소년수들을 돕는 봉사원으로서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제가 머무르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란 생각에서입니다. 젊은 날의 열정은 감옥에서도 피어나고, 삶은 오늘도 새롭기만 합니다. 설령 감옥이라고 피어나지 못할 젊음은 아니지만, 그곳이 이웃과 사회를 위한 길이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한 시대를 내다보는 혜안으로써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병역법개정 법률안에 대한 의원님의 심사숙고와 지혜로운 판단을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바쁘신 의정활동 가운데서도 끝까지 읽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건강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2004년 11월 오태양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