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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샨사 데뷔작 <천안문> 표지
ⓒ 북폴리오
샨사. 중국인의 피를 타고났지만 프랑스에서 작가 활동을 하는 샨사. 그녀가 25세에 <천안문>으로 소설 창작 노동자 데뷔를 한 이후 <버드나무의 네 가지 삶> <바둑 두는 여자> <측천무후>를 펴내었으니, 모두 네 편(<측천무후>는 양도 만만치 않다).

18년 동안 익숙해진 모국어가 아니라 불어로 글을 쓰면서 빼어난 심리묘사를 하는 데다 치밀하게 잔가지를 잘라내며 문체를 다듬는 표정이 보이니, 이것이 그녀를 더 크게 보이게 한다. 중국의 큰 서사적 줄기를 다루면서 이만큼 색깔이 다른 샨사만의 소설을 써내기가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먼저 <천안문> 서평으로 샨사 소설에서 느낀 가슴의 문을 연다.

..베이징, 자정. 청명한 하늘에 초승달.

군대는 천안문 광장을 에워싸고 있던 진열에 이미 틈새를 열어놓은 상태다. 병사들의 호송하에 수많은 학생들이 천천히 장안(長安) 거리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축했다. 여기저기 신음과 한숨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광장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하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전차 굴러가는 소리며, 간헐적으로 들리는 총성. 그리고 제각기 지시를 전달하는 군인들의 거친 목소리들. 그러는 가운데 고개를 푹 숙인 채 홀로 걷던 한 여대생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이윽고 발길을 멈춘 여자는 터벅터벅 걸어가는 군중을 향해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모두 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 전차가 밀려오고 총알이 빗발치듯 하는 천안문 광장에서, 공산당 정부에 맞서 천안문 시위와 단식 농성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여자 주인물 아야메는 자기 목숨만을 살리기 위해서 달아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고교 동기 대학생 샤오의 도움을 받던 중 샤오가 총상을 입자 죽을 위기에 이른다. 그때 착한 트럭 운전사 왕의 도움을 받는다.

2장 : 남자 주 인물인 자오 중위가 등장한다. '도시의 역사 기념물들을 집어삼킬 듯' 바라보았던 그의 임무는 범법자 아야메 심문. 공산당과 사회주의에 충성하는 그는 시위대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기관단총 사격으로 간신히 탈출한 상태. 탈출할 때의 자오의 심리를 샨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돌풍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어지러이 쓰러지는 사람 몸뚱어리들을 스치듯 훑어보면서 그는 신음과 통곡소리가 오히려 기분 좋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3장 : 왕은 아야메를 그녀의 삼촌집에 데려갔지만, "벽에도 귀가 있는 법이에요. 이웃집에서 그러잖아도 우릴 꼴사나워 하는데 언제든 고발할 수 있다구요"하는 팽 숙모의 반대로 일단 아야메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거기서 왕의 아내가 읽어주는 신문기사 내용(국가 평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절대권력, 공산주의 이상의 승리를 상징하는 천안문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을 들을 때의 아야메의 심리를 샨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낭독을 중단시켰다. 아야메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앉아 있던 의자가 나뒹군 것이다.'

4장 : 자오 중위가 아야메의 집을 가택수색하는 동안 딸의 사진을 보호하려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는다. 아야메의 일기를 빼앗은 자오에게, 한 번도 딸의 일기를 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말한다.

"확신하건대 분명히 당신은 그 안에서 열정에 차 있고 감수성 깊은 한 순수한 영혼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딸이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런 죄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임을 깨닫게 될 거예요. 당신은 그 애를 체포하지 않게 될 겁니다."

5장 : 일기장에는 아야메의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다. 남자친구의 이름은 민. 전학 온 민은 과학 공부는 뒷전이지만, 문학과 그림을 좋아하는 순수 영혼을 가진 소년. <삼국지>를 선물해 주었던 민은 어느 날 언덕에서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아야메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내 비밀을 말해줄게. 저기 서쪽 방향을 좀 봐.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 보이지? 이제 저기 동쪽을 바라봐. 수레를 끌고 가는 농부 한 명이 보일 거야. 그 두 사람은 전혀 마주친 적이 없지. 둘 중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을 거야.

하지만 여기, 이곳에서 우리는 그 모두를 한꺼번에 바라보고 있어. 우린 모든 걸 아는 셈이지. 세계가 마치 한 권의 책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 오면 내가 가진 고통을 잊을 수가 있어. 자유로워지는 거지. 삶은 저 아래에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높은 곳, 하늘 가까이에 이렇게 있으니까."


아야메와 민 사이의 사랑은 나쁜 소문으로 번져나가고, 민은 퇴학당하여 어디에도 전학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고 어느 날 민은 동반자살을 꾀하지만, 말리는 아야메의 손을 놓고 민 혼자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소용돌이치는 물 속으로 사라진다.

일기장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자오는 아야메를 숨겨준 왕을 붙잡았다는 보고를 듣는다.

6장 : 왕이 체포된 것은 이웃 사람의 신고 때문. 결국 고문을 못 이긴 채 왕의 아내가 자백하고, 왕의 부모 집에 도착한 자오 중위는 아야메가 새로 쓴 일기를 발견하고 읽어나간다. 일기에서 아야메의 순수한 영혼과 민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발견한 자오 중위는 '감정, 연민, 사랑'과 '의무, 희생, 복종' 사이에서 번민한다.

7장 : 어부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자오 중위는 나이 든 어부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산은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다, 저 산들은 길고 새카만 머리채를 발에까지 늘어뜨린 젊은 처녀 정령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하는.

8장 : 아야메는 군인들의 수색을 피해 달아나다가 이따금 마을에 나타나던 벙어리 같은 청년을 만난다. 버려진 사원에서 쥐를 구워먹는 그 청년은, 아야메가 그 모습에 질겁을 하자 통닭과 만두를 구해다 준다. 어느 날 청년은 멱을 감고 긴 머리를 빗질하는 아야메의 맨몸을 훔쳐보게 된다.

9장 : 중추절. 제단에서 민의 혼령과 학살의 밤 동안 희생당한 친구들, 부모의 안위와 왕의 행복, 청년의 안녕과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해 빌고 또 빈 아야메는, 홍주를 마시고 청년과 더불어 환상일지 모를 체험을 하다가, 청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략) 다른 아이들처럼 소녀도 가족과 학교와 사회, 특히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 앞에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배웠단다. 소녀는 착한 아이였어.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소녀 앞에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방법, 다른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얘기해 주는 어떤 소년이 나타나게 된 거야. 둘 사이의 우정은 이른바 그 둘의 교육을 담당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둘을 떼어놓으려 발악을 했지……. 결국 소년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소녀는 삶을 택하고 말았어. (이하 생략)"


자오는 쌍안경으로 아야메를 발견하지만, (그녀는 이미 붉게 타오르는 정령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차마 체포하러 갈 수 없는 심리를 암시하며 이 소설은 막을 내린다.

1972년에 베이징에서 태어난 샨사는 8세 때 이미 시를 쓰기 시작하여 아홉 살 때 첫 시집을 출간하면서 중국의 예술 신동으로 자라났으며, 17세인 1989년에 '장래가 촉망되는 베이징의 별'로 선정되었다. 공교롭게도 <천안문>의 배경이 된 천안문 사태의 해(1990년)에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유학을 갔으며, 파리 카톨릭 인스티튜트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천안문>에는 '클로소프스키 드 롤라 백작 부부인 발튀스와 세즈코, 광막한 설경을 배경으로 존재하시기에 이 소설을 바친다'는 헌사가 붙어 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 샨사는 당대에 손꼽히는 화가 중 한 명인 발튀스(아내는 일본인 세즈코)의 비서로서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천안문>을 썼다고 한다. 샨사 나이 25세 때.

'콩쿠르 뒤 프르미에 로망상' '보카치오상' '프랑스 아카데미 문학창작 지원상' 등을 수상한 이 소설에 대해 프랑스의 <르 몽드>는 이렇게 극찬했다.

'두 남녀 주인공의 극적인 만남과 사랑, 혹은 현실적 질서와 이상적 진보의 첨예한 대결이 아닌 신비주의적인 경이의 낯선 세계로 훌쩍 날아올라 그 모든 갈등과 대결의 구도를 일거에 해결한다.'

신비스러운 풍경을 지닌 스위스, 중립국 스위스에서 이 소설은 탄생했다. 그러나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 창조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오히려 후반부에 이르러 그 부분이 너무 장황해지지 않았던가, 사실주의 소설이 후반부에 이르면서 갑자기 우화로 뒤바뀌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두 번 읽고서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현실이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린 느낌.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체제의 폭압을 이겨내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순수한 영혼과 사랑뿐'이라는 작가의 목소리는 짐작하겠는데, 환상에 빠져든 장면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오히려 현실도피의 오해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이것은 또한 내 취향대로의 해석일 뿐, 오히려 이러한 구성을 '새로운 우화 기법'이라거나 또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새로운 실험'이라며 참신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천안문

샨 사 지음, 성귀수 옮김, 북폴리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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