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세월은 물처럼 흐른 뒤에야 비로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고목과 아름드리 소나무만이 물끄러미 산 행자를 맞이한다.
보경사는 세상에 제 몸을 내버린 무책임한 중생과 속인을 맞이하기에 한 치 부족함이 없다. 계곡의 풍경 또한 쉽사리 세상일을 잊게 만든다.
계곡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계곡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도 좋다. 희미하게 끊어질 듯 이어진 길을 찾아 가다 보면 쉽게 접할 수 없는 비경들을 볼 수 있다. 바위덩이를 비껴 이리 돌고 저리 돌다 금세 상생폭포에 이른다. 향로봉(930m)에 갈 것이 아니라면 시간은 충분히 많다.
조용히 물 흐르는 소리를 듣자면 근심 걱정 희로애락이 함께 흘러가듯 느껴진다. 물 흐르는 소리가 귀에 익으면 이제 물새 우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삐리삐삐 우는 물새는 낙엽을 쓸어내는 바람소리와 함께 계곡 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음이다.
물새 소리는 해가 지기 전에 일찌감치 서둘러서 사라진다. 물새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면 산행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안전하게 마을까지 내려올 수 있다.
보경사 청하계곡은 계절마다 사색이 뚜렷하다. 봄에는 삿갓나물, 곰취나물, 바위취 할 것 없고 가을에는 지천이 송이 밭이다. 여름엔 맑고 찬 계곡과 짙은 녹음이 우거지고 겨울이면 눈 덮인 계곡이 너무도 장관이다.
꼬불꼬불 이리 돌고 저리 돌다 보면 연산폭에 이르게 된다. 보경사 청하계곡은 연산폭 주위의 풍경을 중심과 정점으로 하여 보경사 중산리 쪽의 거칠고 굽이치는 비경과 향로봉 시명리의 은은하고 평온한 비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연산암을 돌아 가빠른 길을 올라서면 왠지 모를 평온함이 찾아온다. 물소리도 잔잔하다. 연산폭의 낙수소리가 점점 작아지면 계곡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시명리에 이르면 집터가 여기 저기 보인다. 향로봉에 오를 게 아니라면 아쉽지만 하산해야 한다. 내려오는 길엔 작고 볼 폼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암자에 들러 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