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눈발이 스산하게 흩날리는 초겨울입니다. 교정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올해 달력도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 한 장 남았습니다.
며칠 전 악동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그냥 지나치려다 한 마디 건넸습니다.
"이 녀석들, 공부 안 하고 여기 모여서 무슨 모의야?"
"샘, 저희들 올 해가 가기 전에 피를 한번 보기로 했습니다."
"뭐? 피를 보기로 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사고라도 치겠다는 거야?"
"사고라니요? 샘은 우리를 만날 사고나 치고 다니는 사고뭉치로 아시나봐. 아니, 뭐 사고라면 굉장한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집단으로 하기로 했으니까. 얘들아 안 그러니?"
"응, 그러고 보니 그러네. 맞다 맞아."
"인석들이 산 너머 산이라고, 뭐 집단으로 어쩌구 저쩌구, 너희들 한번 혼나볼래."
"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우리가 어느 샘 제자인데 사고를 치겠습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뜻있는 일 한번 해보자고 했어요."
그 '굉장한 사고'라는 것이 바로 헌혈이었습니다. 혼내기는커녕 아낌없이 칭찬해줘야 할 일이지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 딱히 할 봉사활동도 적어 고민하던 차에 '뜨거운 젊은 피'로 좋은 일 한번씩 하고 싶었다는 이 아이들의 기특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가장 혈기 왕성할 나이에 학교라는 공간에 갇혀, 고생하는 아이들이 늘 안타깝습니다. 공부 스트레스만 아니면 이 아이들이, 아니 대한민국이 다 행복할 텐데… .
"샘, 단풍나무도 헌혈을 하고 싶은가 봐요"
그러고 보니,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새를 떨어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는데, 첫눈까지 내린 초겨울인데도 단풍나무만이 헌혈하는 학생들에게 큰 칭찬을 하고 싶어선지 지금껏 붉은 입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풍나무와 오늘 헌혈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마음을 담아, 시 한 수 선사합니다.
단 풍 꽃
나무가 빚어내는
저녁놀
겨울 아니, 봄을 위해 여는
저고리 옷고름
떠나가는 여름을 향한
두견이의 피울음빛 꽃상여
서산마루에서 허리 펴고 웃어보는
할머니의 허허로움
골고다 십자가상에서
피어 내리는 보혈
단풍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