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끼치는 파급이 큰 만큼 거의 모든 신문만평에서도 수능부정사건을 한 번 이상 다루고 있다. 만평을 훑어보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우리 사회가 수능부정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으므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휴대전화가 부정행위 수단으로 활용된 데에 대한 놀라움과 이에 대한 대책으로 논의한 전자파 차단방안을 다루는 만평들이 있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휴대전화가 수능에 활용되었다는데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보니 이 또한 몇 년째 대물림해 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세대들답게 정보와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나 할까? 아무튼 수능 변별력도 문제 삼는 마당에 감시 감독방안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만평 중에 제일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시각이다. 수능부정행위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학교에서 예나 지금이나 시험에 커닝(부정행위)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행위의 이면에는 성적지향주의, 학벌지향주의, 입시위주 교육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부정행위들은 시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도, 선거에도, 입사에도 심지어 군입대 신체검사에도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사회가 이렇게 부정으로 얼룩져 있는데 누가 이 학생들에게만 욕할 수 있겠는가? 배계규 작가의 만평처럼 부정행위를 한 학생은 지금 당장 사회에 내놓아도 잘 적응할 학생이고, 손문상 작가의 만평처럼 우리 사회에서 큰 일을 해낼 학생이 아닌가?
풍선에 바람을 가득 넣으면 제일 약한 곳이 터진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이와 같다. 우리 사회의 만연한 문제가 가장 여린 청소년들의 문제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수능부정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대개 놀랍고, 한심스럽고, 학생들이 왜 저 지경이 되었을까 한탄했을 것이다. 많은 분들이 아마 '쟤들은 왜 그랬을까?' 하는 질문을 해봤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만평이 있다. 바로 권범철 작가의 만평이다.
흔히 교육자들이 방송에 나와 "판단능력이 없는 청소년들에게"하고 말한다. 그러나 학자들에 따르면 중학생 정도 되면 사람의 인지와 사고능력은 이미 성숙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판단능력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판단능력이 미성숙했다고 해야 하며,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신의 판단에 책임지는 연습이 덜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자동차 운전법규를 잘 안다고 능숙한 운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운전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력을 쌓고 좋은 운전습관을 익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가벼운 사고도 경험하고, 길을 몰라 헤매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청소년기는 능숙한 운전자가 겪어야 하는 과정처럼 시행착오와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는 시기다. 인생을 고민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고민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이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부만을 강요했고, 일류대학만을 외쳤다. 자연히 청소년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왜?'라는 질문에 답할 기회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권범철 작가의 만평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왜 청소년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안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