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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 읽는 기쁨>
책 <시 읽는 기쁨> ⓒ 작가정신
"시에 무관심한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시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시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시에 관심을 갖게 되면 삶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시는 그렇게 어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이 책의 서문은 이와 같은 글로 시작한다. 저자 정효구는 영화와 대중가요 그리고 컴퓨터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데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저자가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믿음이란 '시를 사랑하는 일은 마음 속에 자연을 품고 사는 일이며, 시를 읽으면서 자아와 세계를 통찰하는 힘이 생긴다'는 것.

시가 죽어가고 있다고 소란을 떨고 시인들을 시대의 변방으로 밀어내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시와 시인들을 보기 좋은 모습으로 살려내고 싶은 열망은 이 책을 저술하는 이유가 되었다.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시는 바로 천상병의 <귀천>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로 시작하는 이 시에 대하여 저자는 죽음 앞에 초연한 시인의 태도에 감탄한다. 이 시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까닭은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전혀 공포스럽지 않게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죽음과의 화해를 통해 시인은 '이슬과 손잡고 공기의 이미지로 하늘로 사라지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이 소망은 시인 자신의 초월적 자세를 담고 있기에 많은 이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시가 지닌 낭만성과 이상성은 이처럼 초월과 환각 작용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유명한 철학가와 사상가, 작가의 이름을 내세워 커피를 파는 메뉴판을 소재로 한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는 현대적이면서도 냉철한 세계 비판이 담겨 있다. 유명한 20세기의 인물들이 커피숍 메뉴판에 등장하는 사회. 이 묘사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오규원 시인은 본질이 이미지로 포장된 시대, 상품을 위하여 아첨하는 시대, 모든 것이 도구화된 시대를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이미지, 포장, 상품, 아첨, 도구 등은 인간살이의 필수품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인간살이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행세해서는 곤란합니다. (중략) 오규원 시인이 찻집 메뉴판을 보고 안타까워한 것은 바로 인간의 모든 것이 상품을 위해 도구화된 현장을 그곳에서 적나라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가 어려운 것은 아마도 이러한 해석을 독자 스스로 내리기엔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효구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소개한다. 독자는 그저 그의 입김을 따라 다니며 넘쳐나는 시들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시인들의 미학적 세계에 조금 더 접근하기만 하면 된다.

현대적인 시, 초월적인 시, 아름다운 시, 통속적인 시, 철학적인 시 등 소개되는 시들도 그 색깔이 각기 다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시를 해석하는 입장에서 저자의 태도는 시인들에 대한 존중과 시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시를 읽으면서도 하나도 어렵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 정현종의 <좋은 풍경>


이 시에 대해 독자들은 외설적이라고, 부도덕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언어 표현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면 이 시는 그렇게 '야한' 시가 될 수만은 없다.

"만약 정현종 시인이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를 '남녀 한 쌍이 올라가더니'로 표현되었다면 표현의 묘미는 반감되었을 거예요. 또 이 시인이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를 '밤나무에 기대서 키스를 하는 바람에'라고 표현했다면 시적 묘미는 거의 없어졌을 거예요.(중략)

정현종의 위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도덕과 법과 제도와 관습을 초월한 자유인의 상상력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정현종의 위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성(性)이 성(聖)으로 승화된 비밀을 볼 수 있습니다. 정현종의 위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사랑으로 만난 두 존재의 교감 속에 있다는 걸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현종의 위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간접적 언어의 신비로운 묘미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감칠맛 나는 해석들은 시의 의미를 더욱더 풍부하게 해준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시에 좀더 쉽게 다가서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시는 어렵고 알 수 없는 언어들의 집합이 아니다. 시는 긍정과 포용, 부정과 비판을 통해 더 큰 긍정에 도달할 수 있는 언어의 유희이다.

시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소시민적 삶 속에 존재하는 철학에 있다. 저자는 오탁번의 시 <토요일 오후>를 들면서 '내가 역사를 바꾸겠다느니, 내가 인류를 구원하겠다느니, 내가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겠다느니 하는 식의 영웅적 인물'이 아닌 소시민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던진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보통 인간들의 자그마한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시. 그 간결하고 은유적인 언어적 표현 속에서 우리는 소박한 삶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가 어렵다고 멀리하기보다는 이 책처럼 쉬운 언어로 시를 해설해 주는 글을 읽어보는 것도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꿈을 꾸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데에도 시는 도움을 준다. 비록 그 세계가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 할지라도 꿈은 사람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는 힘이 있다.

그러기에 비합리적인 언어 표현인 시 또한 인간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해 주는 좋은 꿈이다. 많은 독자들이 시를 통해 그 꿈을 찾아가길 바라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시 읽는 기쁨 - 한국 현대 시인 25인과의 아름다운 만남

정효구 지음, 작가정신(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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