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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심포지엄 첫발… 불두 복원, 국보 지정 추진 당위성 제기

충남 예산 사면석불이 태안과 서산의 마애삼존석불보다 앞선 6세기 전반 혹은 중반에 조성됐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지난 2일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가 주최한 ‘백제문화 재조명-예산백제 사면석불의 검토’ 심포지엄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세 명의 학자들은 예산사면석불이,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시대 석불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는 그동안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한 예산 사면석불에 관해 가진 첫 학술회의에서 나온 결과로 앞으로 가치 재평가와 사후 사업에서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있는 백제시대 사면석불
ⓒ 장선애
이날 첫 번째 주제발표를 맡은 동아대학교 정은우(불교미술사 전공)교수는 불두의 형상과 광배, 수인 형식, 착의 등을 중국의 불상과 면밀하게 비교발표한 뒤 조성시기를 6세기중반에서 후반 경으로 추측했다.

정 교수는 예산사면석불이 “고르지 않은 암석에 좌상과 입상을 배치한 모습이라든지 크기를 다르게 표현한 점 등 중국에서는 그 예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면서 그 조성시기를 “중국 남·북조 양식을 받아들여 수용하고 이해하기 시작하는 사비시대(538~660)작품으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정 교수는 맺음말을 통해 “예산사면석불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체적인 형상을 조형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복원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두 번째 주제발표에 나선 도다 유지(戶田有二, 일본 國士館대학 교수)교수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연화문(蓮華文)을 중심으로 예산사면석불을 연구한 결과 “시기적으로 절대연대를 부여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서산 마애삼존불의 연화문에 앞서는 것을 알 수 있고, 중국 남북조의 영향 하에서 웅진-사비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정재윤(독립기념관 재직, 백제사 전공) 선생은 미술사적 비교고찰이 아닌 문헌사적 접근을 통해 연구한 결과 그 조성시기를 먼저 발표한 두 학자들보다도 앞선 6세기 초반으로 추측했다.

정 선생은 “예산사면석불이 위치한 화전리 지역이 아산만을 이용한 교통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웅진도읍기, 이중에서도 백제가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에 아산만을 이용한 중국과의 교류를 하던 시기인 6세기 초반, 즉 늦어도 554년 이전, 빠르면 웅진도읍기까지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정 선생은 또 예산사면석불이 조성된 이유에 대한 고찰결과도 발표, 관심을 끌었다. 발표에 따르면 “예산사면석불이 조성된 시기의 백제는 성왕이 재위하던 때인데 성왕 대에 대외팽창의 요로에 사면석불을 조성함으로써 통치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킬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제와 토론을 맡은 학자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 장선애


세 학자들의 주제발표가 끝난 뒤 이어진 지정토론에서 조원창 중원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 최맹식 문화재청 매장문화재과장, 이남석 공주대학교 박물관장이 차례로 나서 토론주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 문제제기와 앞으로의 과제를 제기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학자들은 ‘백제의 도읍지가 아닌 예산 땅에 사면석불을 조성한 이유’, ‘당시 발굴조사가 400여 평에 제한돼 좀 더 넓은 지역을 발굴하면 가람배치도 나올 가능성’, ‘불두 복원과 그 방식에 대한 검토’등을 앞으로의 과제로 제기했다.

지정토론 후 이어진 객석질문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특히 최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태안마애삼존불의 예를 들며 그보다 연대가 앞서고 문화재적 가치도 뒤지지 않는 예산사면석불의 국보로 지정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이 나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의의 큰 박수를 받았다.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윤용혁 교수는 일반 주민들로 주가 된 방청객들을 위해 성의 있는 설명을 덧붙이며 예산사면석불과 관련, 주민과 지자체의 지속적인 관심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윤 교수는 “예산사면석불을 소개할 때마다 ‘면목 없는 부처님’, ‘외로운 부처님’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런 말을 안 해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늘 첫 씨앗을 뿌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가꾸고 활용할 것인지 자긍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날 학술회의장에는 예산사면석불이 소재해 있는 봉산면 주민 70여명과 박인용 면장이 자리를 지켜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날 발표와 토론, 사회를 맡은 학자들도 이런 현상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민들에게 구전되는 역사를 묻는 등 학술회의로서는 드물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 국립 공주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불두 3점
ⓒ 장선애


불두, 국립 공주박물관서 20년째 잠자

일반인들에게는 훼손돼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예산 화전리사면석불(이하 사면석불)의 불두(佛頭)와 파편들이 국립공주박물관 수장고에 20년째 보관돼 있으나 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 일반 공개가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있는 예산사면석불은 발견당시 ‘백제불교의 정수(精粹)이며 사방불(四方佛)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큰 관심을 모으며 보물 79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발굴조사를 맡았던 박영복 당시 공주박물관장의 논문이후 이에 대한 기초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군과 군민들의 관심이 없어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함께 수습된 불두와 파편은 복원여부에 대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사면석불의 몸체만 그 자리에 남겨놓고 나머지는 공주박물관에 보관하게 된 것.

또 예산군지를 비롯한 문화재 관련 자료집에는 불두의 존재와 보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 사면석불의 가치에 관심을 갖고 이곳을 다녀간 많은 관광객과 주민들은 불두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잘못 알고 있다.

공주박물관 수장고에 20년째 보관된 이 불두는 그 관람이 매우 까다로워 일반 공개가 극히 제한되고 있다.

본지 기자가 사면석불 관람을 위해 공주박물관의 요청에 맞춰 세 차례 공문을 보내고 연구실 관계자와 거듭 통화를 했으나 “훼손의 우려가 있어 실물공개는 어렵고 사진자료만 협조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이 박물관 관계자는 “유물은 자꾸 들고 내다보면 자칫 훼손 우려가 있어 연구를 위한 실측의 필요성 등 박물관의 판단에 따라 공개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예산사면석불의 복원과 가치 재평가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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