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경북 대구. 김춘수(시인·2004년 타계)의 시를 가슴 깊이 흠모하던 문학소녀가 있었다. 동네어른들의 자자한 칭찬 속에 명문 경북여고를 다니며 효성여대 등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언제나 '1등을 먹던' 소녀시인. "시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라 생각하던 순수의 시절이었다.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중반. 20대 소녀는 인간의 힘으로는 쉬이 거부키 어려운 '운명적 사랑'을 만났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은 미군 대령. 결혼을 말하는 그녀를 모두가 말렸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살아있어야 할 유일한 이유"라고 말하는 아버지뻘의 사내를 여자는 끝내 내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7년 도미(渡美).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의 고생은 필설로 형언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이 있었기에 그 모든 시간이 그저 고통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30년에 가까운 세월. 그간 그토록 서로를 사랑했던 대령은 세상을 떠났고, 우연 아니, 필연처럼 만난 대만 남자와 재혼도 했다. 레스토랑 사업과 미술관 경영을 통해 적지 않은 돈도 벌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
오십이 넘어서면서 '문학소녀'의 가슴엔 모래바람이 불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휘감았던 '문학에의 열병'이 재발한 것이다. 그 병은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치료가 불가능했다. 컴퓨터 자판이 아닌 볼펜을 붙들고 꼬박 8개월을 정신없이 보냈다. 손목과 어깨가 끊임없이 시려오는 병을 얻고서야 완성한 한 편의 소설. 그것이 지난 2002년 출간된 자전소설 <찔레꽃>이었다.
그 문학소녀의 이름은 이기희(51). 최근 그녀는 사연과 곡절 많은 자신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더하고 뺌 없이 독자들 앞에 드러냈다.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휴먼앤북스)으로 명명된 수필집은 '사랑'과 '문학'이란 두 화두(華頭)를 잠시잠깐도 잊지 않고 살아온 '진실한 여자'의 뜨거운 자기고백으로 읽힌다.
'글을 쓰는 것 외에는 살아온 오십 년 인생을 되돌아 볼 방법이 없었다'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며 '오십 다섯이 되면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이기희. 단 한시도 허술하게 살아오지 않은 그녀의 삶은 구구한 설명 없이도 '대충' 살아온 우리를 반성케한다.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은 독자들에게 "한국어와 문학에 대한 사랑이 나를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했다"는 이기희의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만나게 한다. 그녀의 진솔한 고백은 그저 그런 '외국에서의 성공담'이 아니기에 그 울림 또한 크다.
올곧은 작가정신과 기쁘게 만나다
- <남정현 대표소설선집>
1965년 <현대문학> 3월호. 반미 우화소설 <분지(糞地)>가 발표된다. 그 이후에 일어난 정치·사회·문화적 충격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할까. 작가는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고, 문제의 작품을 실은 잡지는 흉악스런 박정희 정권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다. 재판과정에서 스타로 떠오른 이어령(전 문화부장관)의 이야기도 있으니 전말이 궁금한 사람은 관련 문헌을 찾아볼 일이다.
바로 그 <분지>의 작가인 남정현(71)의 대표소설선집이 실천문학사에게 출간됐다. 직설과 날것이 아닌, 은유와 풍자의 저항을 선택했던 작가의 대표작 <너는 뭐냐> <광태(狂態)> <부주전상서> <방귀 소리> <발길질-허허 선생> <세상의 그 끝에서> 등이 수록됐다. 이는 1960년대 작품에서 1995년 발표한 근작까지가 총망라된 것.
선집을 출간한 실천문학사 측은 "이번 책에 실린 작품들은 작가가 직접 가려 뽑고 일정 부분 손질까지 가한 것으로, 독자들에게 가치전도된 현실을 밝은 눈으로 풍자·비판해온 남정현 선생의 진면목을 확인시켜줄 것"이라 자신했다.
이태 전이던가. 남정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아직도 미국이 정한 룰로만 위태위태 걸어가는 이 나라는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다. 죽기 전에 이 땅이 식민지가 아닌 자주독립국으로 우뚝 서는 걸 보고싶다"던 그의 말에 감동했던 기억이 여태도 생생하다.
<남정현 대표소설전집>을 접한 문학평론가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평생을 글이라는 것에 의지해 살면서 글이라는 것이 인간다운 세상을 이루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열망했던 한 인간의 희망과 좌절에 관한 숨김없는 내면적 고백"이라는 말로 선배작가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했다.
남정현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안의 비겁과 굴종을 깨뜨리는 아프지만 빛나는 체험에 다름 아니다. 세월 혹은, 세상 탓에 어깨 움츠리고 사는 심약한 청년들이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다.
사랑아, 너는 대체 뭐냐?
- 공선옥·박수영·함정임 등 공저 <저기 네가 오고 있다>
애정과 증오, 희망과 절망, 환희와 고통 속에서 '문학의 길'을 걸어온 작가 16명이 하나의 주제로 글을 써 모았다. 보통의 사람들이 주고받는 한마디 농담에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받거나, 살아가야 할 빛나는 이유를 찾는 문인들. 그들이 <저기 네가 오고 있다>(섬앤섬)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공안(公案)은 '사랑'이다.
<피어라 수선화>의 공선옥, <은어낚시통신>의 윤대녕, <황진이>의 전경린, <종이꽃>의 정길연, <루빈의 술잔>의 하성란, <매혹>의 박수영, <밤은 말한다>의 함정임 등 필자들은 인류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동시에 제기된 질문 '인간에게 사랑은 무엇이고, 사랑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아프게 묻는다.
인간인 우리가 '감히' 사랑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부연을 붙일 수 있을까? 책은 각각의 작가가 붙인 제목만으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내 영혼을 자유롭게 해준 그대여'(박수영)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김훈)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찾아온 사랑'(전경린) '사랑이라니, 가슴 속 수많은 별들이라니'(하성란) 등등.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죽고 살아야할 이유를 찾는다. 하여, 책의 말미에 발문격으로 붙인 황지우의 시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들 여윈 영혼을 흔든다. 서럽다. 그러나, 그 서러움으로 인해 아름답다.
...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 한 줄 이상의 의미로 읽는 신간들 | | | |
| | | | ⓒ문이당 | 이청해 소설집 <악보 넘기는 남자>(문이당)
거대하고, 세련된 것들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작고 하찮은 것들에 애정을 쏟아온 작가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소설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촉수를 뻗어 그들의 상처를 매만지는 모습이 애틋하다.
우리가 제 아무리 '잘 살려고' 해도 세상이 그걸 쉬이 허락했던가. 이청해는 안타깝지만 견딜 수밖에 없는 사람살이의 고단함을 물기 젖은 문장으로 위로한다. 표제작은 물론, '커다란 초록색 눈' '오후의 빛' 등이 가슴을 친다.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아픔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김정환 산문집 <고유명사들의 공동체>(삼인)
감히 누가 어떤 폭설에도 미끌어지지 않는 독일산 명차의 광폭바퀴 같은 그의 정신세계를 규정할 수 있을까? 시인이자 소설가, 역사연구자이자 미학자인 '멀티 인간' 김정환이 독자들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너희가 예술을 아느냐?"
김형경 여행에세이 <사람 풍경>(아침바다)
있어도 표나지 않고, 없어도 빈자리를 쉬이 눈치챌 수 없는 작가. 그러나, 어디에서나 빛나는 문장으로 자신만의 영지(領地)을 구축해온 김형경의 기행문. 그녀는 로마와 파리에서 대체 무엇을 봤을까.
2004년판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느린걸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몹시도 궁금한 시인. 1980년대 언필칭 '노동문학판'을 백무산과 함께 양분했던 박노해를 다시 만난다. 그는 아직도 전사(戰士)인가? 그게 아니면 투항한 딜레땅뜨인가?
다나카 게이코의 <내 남편 역도산>(자음과모음)
연기 잘 하는 배우 설경구의 영화와 함께 보면 좋을 책.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에서 살았던 역도산의 환호와 절망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아내의 가감 없는 기록. '전설'로서의 역도산이 아닌 '인간' 역도산을 들여다본다.
버지니어 울프의 <막간>(솔)
일견 서정적이고, 유머가 가득해 보인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문장마다에 숨겨진 인간에 대한 서늘한 탐구를 놓치지 않아야 현명한 독자다. '전집 간행위원회'까지 만들어 버지니어 울프의 문학을 제대로 복원해내려는 출판사의 노력이 돋보인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