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이 발생한 후 그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관용적인 나라라고 자부하던 네덜란드는 일대 충격에 휩싸였고 사무엘 헌팅턴(미국 하버드대 교수, <문명의 충돌> 저자)이 예고한 문화전쟁이 가시화되는 것인가라는 성급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유명작가 해리 무슬리는 "이번 사건은 자기가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생각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살해를 당한 일"이라고 언급하며 "평화롭고 고요한 작은 네덜란드가 거칠고 유쾌하지 않은 곳으로 바뀌고 있다. 모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조만간 이슬람사원 방화사건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의 생각은 우려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교회, 이슬람사원, 학교에서 방화사건이 잇따라 발생했고 독일에서도 바덴뷔르템베르크의 한 도시에서 이슬람사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동시에 테러 규탄시위도 함께 이어져, 살해 사건 당일, 암스테르담에서 2만여 시민이 모여 테러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독일 쾰른에서도 지난 11월 말 터키계 독일거주자 2만5천여 명이 테러를 규탄하고 이슬람과 크리스트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염원하는 시위를 벌였다.
반 고호 감독 살인 사건과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상황들은 독일사회에 외국인이주자, 특히 이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계의 사회통합문제 논의를 촉발시켰다.
한 영화감독의 피살로 불거진 외국인 이주자 사회통합 문제
2차대전 후 경제 재건과정에서 직면한 대규모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독일은 1955년 이탈리아와 외국인노동자 '수입'을 위한 첫 조약을 체결한 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스페인·그리스·터키·포르투갈·유고 등에서 외국인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중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루투갈 등에서 유입된 손님노동자(Gastarbeiter)들은 초기에는 무시·차별을 당했지만 동일한 크리스트교 문화 배경, 유사한 피부색 등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무리 없이 독일 사회에 안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320만 이상으로 알려진 독일 거주 이슬람계 외국인이주자의 독일사회 통합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실패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엄밀히 말해 실패라기보다 60년대 외국인 손님노동자의 유입이 시작된 이후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통합문제 자체가 독일사회에서 철저히 등한시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외국인 통합문제를 외국인 문제를 관할하는 내무부 소관으로 인식, 내무부 장관에게 모든 것을 떠맡긴 채 한번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그중 250만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터키 출신 이슬람 이주자들은 독일사회 일원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사회'를 이룬 채 살아가는 것으로 독일사회는 평가하고 있다.
독일 속의 터키,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다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의 대도시 곳곳에는 터키출신 이주자가 거주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터키인 밀집주거지역이 존재한다. 독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해도 생활에 불편함이 거의 없는 '터키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독일의 문화, 민주주의 법질서, 가치에 대해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동화하기보다 많은 이들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독어를 배우려는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독일사회와의 의사소통을 단절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주자의 2세들 또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 독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직업생활에 필요한 정규교육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져 결국 부모세대의 통합 문제가 아이들 세대까지 대물림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주자 2세대들의 일부가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 채 직업 없이 사회부조로 살아가며 이슬람극단주의의 영향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는 것을 독일사회는 특히 우려하고 있다.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지난 11월 15일자에서 일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여성인권침해 사례를 심도 있게 다루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이슬람 여성들은 15, 16세 무렵 부모의 강요로 결혼한 후 독일로 와 독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타락한 세상과 접촉을 차단한다는 이유로 남편의 동행 없이는 외출을 하지 못하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슈피겔>은 또 이들이 독일의 일반 가정보다 훨씬 자주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나 독일어를 전혀 못하는데다 사회와의 관계도 단절되어 있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면 주독 터키 대사 알리 이템첼릭은 11월 21일자 독일 시사주간지 <포쿠스> 인터넷판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터키 이주자의 문제가 지나치게 과장된 채 전해지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독일사회에의 통합을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는 다수의 터키인 이주자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독일정치권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선동적인 발언으로 인해 대다수의 건전한 무슬림들이 도매급으로 일부 이슬람 테러집단과 동일시되고 있다"고 비판하며 "그러한 무분별한 주장이 양자 사이에 더 심각한 갈등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독일정치계의 두 흐름, 주류와 비주류 논쟁
이슬람세력의 독일사회 통합에 관한 정치계의 논의는 다문화(Multikultur), 관용과 같은 다양한 가치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각 당의 정치적 지향과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척도가 되고 있다.
크리스트교를 바탕으로 한 독일 사회의 주류문화가 우위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수야당(기민-기사당 연합)은 이주자들이 독일사회의 주류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기민당의 대표 안겔라 마르켈은 12월 6일과 7일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기민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다문화사회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선언하며 이주자들이 독일사회, 주류문화에 '적극적'으로 통합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이에 앞서 기사당 대표 슈토이버는 11월 20일에 열렸던 기사당 전당대회에서 크리스트교를 근간으로 한 '독일문화 사수'를 주장했다. 이는 기민당과 흡사한 견해다. 기사당 전당대회에서는 독일사회에 통합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외국인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논외의 사안이지만 지난 11월 미국 대선결과에 영향을 받은 슈토이버는 2006년 총리선거를 염두에 두고 독일의 크리스트교 정체성과 통합문제를 총리선거 의제로 쟁점화하려는 의지를 비쳤으며 심지어 바이에른 주 각급 학교에 아침 기도회를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야당 연합이 제기하는 주류문화에 대한 주장은 정치권 안팎의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있다. 집권여당인 사민-녹색 연정도 야당의 이러한 주장을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적극 비판하고 있다.
사민-녹색 연정은 "독일은 이미 다문화 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이주노동자들만의 종교가 아닌 독일 사회·문화의 일부"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녹색당 대표 클라우디아 로스는 "기민당이 지난 수십 년 집권 기간 동안 외국인의 사회통합 문제를 완전히 간과했다"고 비판하며 체계적인 외국인 사회통합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슬람세력의 통합을 위해 무슬림의 공휴일을 국가 공휴일에 포함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민당은 "통합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보수야당 연합의 독일사회의 주류문화 논쟁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지난 11월 2일 <함부르그 아벤트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60년대 다른 문화권에서 손님노동자를 유입한 것이 실수라고 할 수 있다"고 발언해 정치권 안팎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슈미트의 발언에 대해 독일사회 곳곳에서 "슈미트의 발언은 과거 독일인이 직접 하지 않으려던 일을 묵묵히 감당함으로써 독일경제 재건에 한 몫 담당했을 뿐 아니라 독일사회의 문화 확장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그들의 역할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해법은 무엇?
연방총리 슈뢰더는 "이슬람은 독일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라고 평가하며 소수자인 외국인이주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그들이 독일사회에서 균등한 기회를 갖도록 공존을 위한 여건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그는 무슬림에게 "독일의 민주주의·문화·가치를 수용하고 독일사회에 통합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독일어를 배울 것"을 주문했다. 독어를 구사하지 않고는 통합도, 그것을 위한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 관련 최근 통과한 새로운 이주자법은 독어 코스와 독일사회 적응과정 이수를 체류의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여기서 좋은 성취도를 보이는 이주자에게 유리한 체류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또 독일 정치권은 이슬람종교를 학교의 종교과목 내용에 포함하는 것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 이슬람을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도 안에서 직접 제공함으로써 자라나는 2세대들이 사회의 통제 밖에 있는 일부 코란학교에서 과격분자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줄이는 동시에 새로운 '유럽 이슬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다.
이와 함께 독일사회와 이슬람 간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수 십 년간 등한시 해온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사자 간 만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녹색당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무슬림 단체와 독일단체 간 교류를 꾸준히 추진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며 기민당도 이슬람계가 지역 단위 조직을 갖추도록 법으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독일 정치권 일부에서 이슬람 단체와 대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진척 속도는 느리다. 이슬람계 내부의 정치적 의견 차이 등의 문제로 전체 이슬람계를 대표할만한 단체가 부재, 마땅한 대화상대가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회의 산하 통합추진위원회의 마리엘루이제 벡 위원장은 11월 29일, 독일의 일간지 <디 벨트>에서 "30년 동안 등한시 해 온 외국인 이주자의 통합 문제는 경제·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통합을 위한 지원은 이주자 2세대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지난 11월 말 독일에서 개최한 통합문제 관련 회의에서 스위스의 심리학자 안드레아 란프란치는 "이주자 2세대들의 모국어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의 모국어는 독어를 배우기 위한 중요한 기본자산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같은 맥락에서 독일사회 일각에서는 이슬람계 이주자의 성공적인 독일사회 통합을 위해서 이주자들이 그들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그들의 문화 정체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계속 유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가운데 독일사회에 동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나뎀 엘야스 독일이슬람회의 대표는 11월 21일자 <헤센-니더작센 알게마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슬람계 이주자들이 독어를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그들의 독일사회통합을 위한 기본적 지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그는 "이슬람계 이주자의 통합을 위해 독일사회가 과감하게 이슬람계에 정치참여의 기회를 개방, 그들이 직접 지방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독일학교의 종교과목에서 이슬람교를 다루어야 하며, 나아가 대학에 이슬람성직자를 교육, 양성하기 위한 학과를 개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도르, 이슬람의 정체성
작년 가을,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이슬람 신자의 차도르 착용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진행한 논의 중에 무슬림이 차도르를 고집하는 것은 - 물론 일차적으로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지만 - "서유럽에서 차별을 받고 있고 또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인식하는 그들이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논의는 결국 공공기관 근무자의 차도르 착용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러한 견해는 통합문제는 어느 한쪽이 아닌 쌍방간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서로 생활양식과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쌍방간의 노력이 통합을 위한 기본 조건이자 핵심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