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최근에 <소설 역도산>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설경구씨가 주연한 영화 <역도산>의 원작입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영화의 원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화를 모방하여 쓴 소설은 더욱 아닙니다. 나는 이미 10년 전인 1994년 12월에 <영웅 역도산>이라는 3000매 분량의 긴 소설을 탈고하여 1995년에 전 3권 분량의 '팩션(faction:fact+fiction)' 작품으로 출간했습니다. 그것을 많이 다듬어 10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한 것입니다. 판권을 가진 출판사도 그대로입니다.
<영웅 역도산>을 어느 부분 덜어내거나 덧붙이고 문체를 다듬었는데, 한권이긴 하지만 600쪽에 가까우니 내용이 많이 줄어든 건 아닙니다. 문장과 문단이 압축된 편이므로 긴장감이 더해졌고 읽는 맛이 오히려 나아졌다고 여겨집니다. 또 한국인으로서의 역도산의 내면이 좀 더 부각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50년대에 '전후 최대의 영웅'으로 일본에서 추앙 받은 역도산을 주인물로 한 팩션 작품을 1990년대 중반에 만든 이유는, '구한말의 조선인 멕시코 노예 이민사'를 복원한 나의 대하소설 <애니깽>(1992년 전6권 완간)의 시대 배경에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드러내기에 역도산이라는 인물이 아주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역도산 자서전 재해석, 역도산 프로레슬링 비디오와 기타 프로레슬링 비디오 분석, 주요 프로레슬링 인사 인터뷰, 당시 일본과 한국의 일간지 및 주간지 분석, 프로레슬링 관련 사료 및 교범 참고 등 다각도의 취재와 분석을 거쳐 상당히 긴 분량의 팩션을 완성했습니다.
초판본 때 '역도산 선생은 나에게 인(忍)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남겨주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나의 신조가 되어 왔다'는 김일옹의 추천사가 들어갔습니다. 이번 개정판엔 김일옹의 수제자인 이왕표 WWA 헤비급 세계챔피언의 추천사도 더불어 들어갔습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인(忍)'이었습니다.
역도산은 조국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맛보고 살아간 대표적인 재일 한국인입니다. 어머니의 반대를 어기고 신방(新房)에서 달아나면서까지 일본 씨름인 스모를 배우고 챔피언인 요코즈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냉대를 받습니다. 그래서 폭발적인 힘과 뛰어난 실력이 분노로 폭발하였습니다. 스모 선수의 상징인 상투를 스스로 잘라 버렸으니까요. 그 뒤 건설 현장의 책임자로 일하다가 술자리의 힘겨루기 상황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프로레슬링이었습니다.
역도산은 혹독한 훈련을 치러내고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숱한 강적을 꺾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이때 사용한 주특기가 바로, 오늘날 제자의 제자인 이왕표 선수가 이따금 보여 주는 손날치기였던 것입니다. 또한 역도산이 실전 유도의 일인자인 기무라 마사히코를 피투성이로 실신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조선인을 냉대한 일본인에 대한 복수였는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그가 철인이라 불리던 세계 최강 프로레슬러 루 테즈를 꺾고 인터내셔널 챔피언이 되었지만 조국은 이미 두쪽으로 갈라진 상황이었습니다. 고향이 휴전선 이북이었기 때문에 고향과 혈육을 만날 수 없었던 역도산은 조국 분단의 한(恨)을 풀지 못한 채 야쿠자의 칼에 피습당했고, 끝내 수술 부작용으로 숨집니다. 때는 1963년 12월 15일, 일본 천황 다음으로 우러르던 역도산의 사망 비보를 들은 일본인들이 오열했지만, 역도산이 같은 핏줄임을 아는 한국인들의 슬픔 또한 컸습니다.
나는 <소설 역도산>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역도산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제자 김일, 그리고 일본에 체류 중이던 한국의 프로복싱 유망주 김기수를 찾을 정도로, 또한 자기 재산의 일부를 조국 건설에 희사하겠다고 측근들에게 밝혔을 정도로 조국과 민족을 잊지 않은 분명한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의 품에 한 인간으로 돌아가, 눈에는 귀기(鬼氣)가 어려 있고 전신은 투지에 불타오르는 목상(木像)으로 우뚝 다시 태어났다. -575쪽
여기서 한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프로레슬링을 돌이켜 보는 기사가 신문에 나올 때마다 1960년대에 장영철 선수가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털어 놓아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하락했다고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 말에 인터내셔널 챔피언인 김일 선수가 안토니오 이노키나 압둘라 부처와 겨루어 무승부까지 갔던 혈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결코 시들지 않았었습니다.
다만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TV 중계방송을 통한 프로야구와 프로씨름의 인기에 밀려나 프로레슬링은 서서히 TV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문화의 모든 부문에는 제대로 된 역사가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긴 팩션 작품이 앞으로 한국의 프로레슬링사 복원에 일조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