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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역사(Exterminate All The Brutes)>(한겨레신문사 간)는 스웨덴의 스벤 린드크비스트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다.

책은 린드크비스트가 알제리에서 니제르(나이지리아)까지 여행하는 기행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게 특이하다. 그러나 그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남긴 깊은 상처를 서구인으로서, 참회의 마음으로 걸어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행 사이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빛나는 서구문명'이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영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영국은 국빈방문 횟수를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한 차례씩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그 격식도 까다로워서, 영국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하는 게 많은 국가원수의 꿈이다(라고 신문들이 쓰고 있다).

노 대통령도 영국의 극진한 대접에 눈이 휘둥그레진 것 같다. 아마도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의 잔상이 아직 왕실에 많이 남아 있어서 그랬는 듯하다.

'영광'? 하지만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우리가 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 볼 게 확실한 그림 몇 장을 보여준다.

우선 아프리카 수단에서 영국군에 대항하던 '데르비시파'라고 불리는 이슬람 저항세력의 부상자를, 무참히 총검으로 찔러대는 영국군의 모습이 나온다. 영국의 키치너 장군은 데르비시파를 학살하고 수단을 손에 넣었다. 그는 영국에서 엄청난 환호를 받는다.

그 뒤에는, 보이스카웃의 창시자로 훗날 유명해지는 영국군 사령관 베이든 포웰의 발 밑에 엎드려 항복하는, 프램페라는 아프리카 한 나라의 국왕과 그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나온다. 이미 다른 부족에게 성능을 과시한 영국군의 신형 무기에,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항복하여 백성을 살리는 것뿐이었다.

포웰은 오만한 표정으로 상자 위에 앉아, 엎드려 기어와서 자기의 다리에 매달리는 국왕을 멸시하듯이 내려다본다. 마치 자기 발을 핥는 개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표정이다.

또, 옴두르만이란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형 총으로 사격을 하는 영국군 멀리에서 무참하게 쓰러져가는 아프리카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는 그림도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영국 신문에 실린 그림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람의 목숨을 개보다도 하찮게 여긴 잔인함에 대한 분노는 없다. 오직 '위대한 승리'에 대한 찬양만이 있을 뿐이었다.

흔히 서구가 세계를 지배한 이유를 '서구인들이 더 일찍, 더 앞선 문명을 이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 역사책도 천편일률적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린드크비스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서구 국가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비해 문화도 문명도 보잘 것 없었다. 그들이 한 가지 앞섰던 것은 오직 살육무기의 개발뿐이었다.

발달한 총과 대포로, 그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살육으로 굴복시켰다. 아무 죄도 없는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을 죽이는 데 그들은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여기에는 찰스 다윈의 죄가 만만치 않다. '적자생존'을 골자로 한 다윈의 진화론은 곧 제국주의의 가증스런 이론 도구가 되었다. 자신들의 학살로 타 대륙의 원주민들이 멸종하게 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유럽인의 노예가 된 것을, 유럽인들은 결과와 원인을 바꿔 버렸다.

곧, 그들이 원래 '열등한 민족'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노예가 되었고 멸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생김새부터가 인간으로 덜 진화한 원숭이에, 이들의 두뇌 역시 서양인보다 작다. 즉 이들은 원래 열등하여, 적자생존의 생태계에서 결국 멸종할 생물들이다. 따라서 우수하여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우리 유럽인(+미국인)들이, 이들을 죽이고 지배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은 여기까지도 벌써 경악할 것이다. 아니, 자유민주주의와 뛰어난 예술을 자랑했던 근대 유럽이, 어떻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제국주의 때문에 다른 대륙들은 좀 못 살게 되었다'라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불성실한 진술로 근대사를 슬쩍 넘어가버리는 세계사 교과서로 공부한 우리로서는 거의 처음 듣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특히 인권의식과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북유럽에서는 이는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광풍은 당시 유럽에서는 극히 '정상적인' 사고였을 뿐이다. 근대사에서 우리가 익숙히 접한 그 이름들, 당시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던 사람들도 제국주의와 진화론에 기초한 인종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 목록을 나열하는 것은, 우리가 위인전 속의 한국 인물들 사이에서 친일파를 찾아내는 것과 같은 충격과 각성을 준다. 찰스 다윈, 러디야드 키플링(<정글북>의 작가), 탐험가 스탠리, 윈스턴 처칠(그는 제국주의 전쟁을 '즐기며', 자신이 죽이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등등.

그리고 그 다윈의 '적자생존론'에 뿌리를 뿌린 많은 학자들은, 바로 우리가 '생물학의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결국 '불쌍한 흑인들'에 대한 '기독교적 인도주의'라는 위선적인 틀을 못 벗어났던 것처럼, 제국주의자들의 머리 속엔 근본적으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라는 전제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제국주의의 광기의 흔적을 여로를 따라 추적하는 린드크비스트의 곁에는 항상 동반자가 있었다. <어둠의 한가운데>을 쓴 조셉 콘래드다. 일찍이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또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가공할 학살을 직접 본 콘래드는, 제국주의의 병균이 거의 모든 유럽인들을 집어삼켰던 그 시대에 얼마 안 되는, '어둠의 한가운데'를 꿰뚫어본 인물이었다.

번영에 취해 있으면서, 사실은 용서할 수 없는 죄들에 영혼을 갉아 먹힌 유럽, 그 자체가 바로 '어둠의 한가운데'였다. 그 소설이 나온 바로 그때(1898)에, 불레라는 프랑스 장교가 정부의 명령으로, 아프리카에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원정을 하다가, 결국 광기(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로 자멸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바로 <어둠의 한가운데>에 나온 커츠의 현시였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상실감' 그 자체였다. 서구 문명의 빛나는 성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개화되었다는 거짓말을 당연한 듯 교육받았던 우리 한국인 대부분에게, 서양제국주의 역사의 진실은 더욱 비통함 같은 걸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인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바로 당사자였고, 따라서 그럴 듯한 변명으로 덮어버리려 해도, 그들이 짓밟은 땅과 문화, 무엇보다 수많은 무고한 시체의 산은 변명으로 덮을 수 없다. 서구인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린드크비스트가 책 마지막에 말했듯이,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부족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결론을 내리는 용기'다.

속죄의 길을 나서려는 용기 있는 움직임이 서구에서도 점점 일어나는 이때에, 제국주의 역사관을 그대로 답습하다시피하는 우리 역시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이 이것 아닐까? 더욱 새롭고 더욱 악랄한 제국주의의 망령이 일어서려고 하는 지금의 세계에서는 말이다.

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한겨레출판(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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