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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가 밀집해있는 서울의 한 거리 모습.
증권사가 밀집해있는 서울의 한 거리 모습. ⓒ 연합뉴스 한상균
"증권사 직원들이 화려해 보이죠? 다른 직업에 비해 월급도 많이 받고, 돈도 많이들 버는 줄만 아는데…. 사실은 빚더미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널려있어요. 여차하면 직장에서 잘려야 되고…. 우리도 다 불쌍한 월급쟁입니다."

지난 8일 사석에서 만난 한 증권사 임원은 스스로를 '불쌍한 월급쟁이'라고 부르며 자조 섞인 웃음을 띠어 보였다.

80년대 초반 모 증권사에 들어온 뒤로 인수합병과 IMF 등 수없이 많은 고난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그였지만, 그의 말속에는 자신의 처지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짙은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올 겨울, 여의도 증권가에는 치열한 인력 구조조정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 직원, 2004년 9월까지 4% 감소

사실 올 한해 동안, 여의도 증권가에는 줄곧 겨울 바람이 불었다. 계절상으론 12월인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됐지만, 인력 구조조정의 한파는 일년 내내 여의도를 관통하고 있었다.

증권협회 통계자료에 따르면, 올해 9월말 현재 증권협회 소속 57개 회원사 임직원 숫자는 3만1485명으로 지난 3월말 3만2843명에 비해 1358명이나 줄어들었다. 3월말 기준으로 무려 4%의 인력이 감축된 셈이다.

작년, 재작년과 비교해 보면 증권사 직원들의 지위는 더 참담해졌다. 2002년 12월말 3만5919명에 이르던 임직원 숫자는 2003년을 거치면서 3만5222명(3월말), 3만4153명(6월말), 3만3516명(9월말), 그리고 3만3242명(12월말)으로 매분기마다 계속 줄어들어 왔다.

이처럼 증권가에 감원 한파가 몰아치는 원인은 급격히 떨어지는 증권사의 수익구조가 한 몫을 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의 전체 당기순이익은 지난해 절반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원이 지난달 28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4∼9월) 전체 증권사의 당기순이익은 8013억원에 달했으나, 올해는 3862억원에 불과해 무려 4151억원이 줄어들었다.

증권거래소가 지난달 18일 발표한 자료를 통해서도 증권사의 부진을 확인할 수 있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상장 증권사 21개 가운데 이익이 증가한 곳은 동양종금증권과 서울증권 뿐이었다.

반면 교보, 한양, SK, 대우증권 등 14개 증권사의 순이익이 줄었고, 메리츠·세종·신흥·한화 등 4개 증권사는 적자로 돌아섰다.

급격히 추락하는 수익 구조가 감원 한파 불러와

이 때문에 증권가의 인력 감축 바람은 일년 내내 그치지 않고 있다. 여의도 증권가는 이에 따라 정든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과 남아서 이를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만감이 교차하는 상태다. 떠난 사람도 떠난 사람이지만, 남아 있는 이들의 불안감은 더욱 더 깊어지고 있는 상태다.

"신문에 (회사에 대한)기사가 한 줄 나면, 동료들이 술렁술렁합니다. 명퇴니 감원이니 다른 회사 소식이 들려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어떤 영향이 있지 않나…."

지난 9일 지하철 여의도역 부근에서 만난 40대 초반의 한 증권사 직원 역시 편치 않은 속내를 그대로 내비쳤다. 모 증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K(41)씨는 "다른 회사 직원들의 명퇴 소식만 들어도 진한 동료 의식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죠.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볼 수도 없고…. 회사를 막론하고 일종의 동료 의식 같은걸 느낍니다. 그냥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불안하기도 하고."

같은 날 만난 또 다른 증권사 직원은 요즘 술좌석에서 가장 많이 듣는 농담이 "'장사나 해야겠다'는 말"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증권사에 몸담은 직원들 중에는 제 발로 걸어나가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구조조정이 예상되는 한 증권사노조 관계자는 "노조는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몇 명을 결정하고 구조조정을 하는 것보다 직원들의 자율적인 희망퇴직으로 가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원해서 나가고 싶어하는 직원들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증권사 직원 과로사, 8월에만 두 건

증권사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단 구조조정의 문제만이 아니다. 잘려나간 동료의 자리를 남아서 메워야 하는 직원들의 노동강도도 그만큼 높아졌다. 이 때문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증권가에서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직원들의 '과로사' 소식도 종종 들려 온다.

지난 10월에 발행된 <증권노보(증권노동자연대 17호)>에 따르면 8월 24일에는 H증권 직원 한 명이 업무 도중 쓰러져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 같은 달 30일에는 또 다른 증권회사의 지점장급 직원이 출근하던 도중 사망한 일도 있었다. 8월 한달에만 2건의 사고가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회사의 같은 동료나 노조에서는 이 같은 사망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노조 관계자는 "증권사 직원이라면 누구나 (그들과) 똑같이 힘든 상황에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내년이 되면 증권가의 임직원 숫자는 더 줄어들고, 증권사 직원들의 노동강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LG투자-우리증권·동원-한투증권의 합병, 하나은행의 대투증권 인수 등 인수·합병 행렬이 내년에도 이어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증권노조는 지난 6일부터 강제 인력구조조정과 유상감자에 반발, 총파업을 선언하고 13일 현재까지 8일째 파업을 진행중이다. 하지만 노조의 파업이 성공리에 끝난다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 구조조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IMF이후 계속되고 있는 증권가의 '죽거나, 혹은 나가거나' 행렬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현재로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 가운데 증권사 직원들의 한숨만 높아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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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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