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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대답에 그는 죽을 듬뿍 떠 다시 건네주었다. 청년은 다시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지노인을 외면하고 천천히 수저로 죽을 떠 넣었다. 약속을 한 것인 만큼 아무리 거지노인이 재차 애절한 눈빛을 보내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 이 죽의 맛은 내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이구려. 어떻게 이런 죽을 만들 수가 있소?”
청년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의 칭찬에 남씨청년은 기분이 좋은 듯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오늘 본 공자는 이 죽을 끓인 것이 매우 잘한 일이라 생각이 드오. 아내는 물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맛있다고 칭찬을 하니….”
그는 말을 하다말고 문득 나중에 들어 온 세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은 죽을 맛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당신들도 본 공자의 맛있는 죽을 맛보고 싶소?”
그는 말과 함께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들이 좋다고 한다면 떠 줄 생각인 것 같았다. 허나 세 사람은 과장된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형제는 오독공자(五毒公子)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
“우리 형제는 오독공자(五毒公子)가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
낭아봉을 든 두 사람의 입에서 똑같은 어조에 똑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마치 죽을 건네주면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무림인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과 별반 다른 반응을 보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독공자라는 명성이 주는 두려움은 누구나 같기 때문이었다.
오독공자(五毒公子) 남화우(南樺紆)는 독공(毒功)에 있어 사천당문을 능가한다는 묘강오독문(苗疆五毒門)의 소문주(小門主)로 무림에 모습을 보인지 벌써 이십여년이 넘어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나이가 사십대 후반의 인물이었다. 그의 독공은 기괴하고 신비스러워 어떻게 하독(下毒)을 하는지 알 수 없고, 더구나 오독문의 오독신공(五毒神功)을 극성에 달하도록 익혀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오독공자 남화우의 기이한 취미는 바로 요리였는데, 그는 이 관왕묘에 놓인 솥과 요리를 할 수 있는 기구들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고, 또한 요리를 해 주위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이 중독(中毒)되거나, 주는 음식을 거부한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 것은 오독공자의 버릇이었다.
남화우는 그들의 대답에 그릇을 바닥에 놓으며 손을 내저었다.
“먹기 싫으면 마시오. 언제부터 낭씨(狼氏) 형제(兄弟)가 본 공자의 음식을 거부할 정도로 간담이 부었는지 모르겠군. 흑모전서(黑毛田鼠)…! 당신도 먹지 않겠소?”
남화우가 낭씨 형제와 같이 들어 온 쥐상의 인물에게 말한 것인데 그의 별호가 흑모전서라면 누가 이름을 붙인 것인지 모르지만 그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그는 정말로 검은 털을 가진 두더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으로서의 흑모전서라는 별호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양상군자(梁上君子)로서의 그의 별호는 보물을 가진 자나 돈 많은 부호들에게는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성가신 존재였다.
흑모전서(黑毛田鼠) 균달(筠澾)은 좀도둑이자 도굴꾼이었다. 그에게는 생긴 것처럼 기괴한 능력이 두 가지 있는데 그 하나가 흙을 파는 능력이고, 또 하나가 냄새 맡는 능력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흙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 하나로 그는 지금껏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보물에 대한 냄새를 맡는 능력이 탁월하여 그는 중원에 기진이보(奇珍異寶)가 나타날 때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이는 자였다.
“고맙소만… 노부는… 저녁을 배불리 먹어서… 더 이상 먹고 싶은 마음이 없소.”
그는 본래 그런지 아니면 겁을 집어먹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말을 더듬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보일 정도로 가련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이면 너무 애초로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허… 이런 곳에서 본 공자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사람을 셋씩이나 만나다니 본 공자로서는 정말 불쾌한 일이군. 하지만 당신들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본 공자를 위해 나타났으니 일단 참아보기로 하겠소.”
그의 말은 묘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만 남화우의 말에 흑모전서 균달의 얼굴은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그 모습을 본 남화우는 다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죽을 먹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 미안하게 됐소. 우리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지 않겠소?”
청년은 고개를 끄떡이며 다 먹은 듯 죽그릇을 내려놓았다.
“물론이오. 일단 내가 먼저 물어봐도 되겠소?”
“무엇을 알고 싶소?”
“저 사람은 왜 죽였소?”
청년이 제단(祭壇)에 기대어 눈을 감고 죽어 있는 흑의인을 가리키며 묻자 남화우는 잠시 청년을 바라보더니 기이한 듯이 물었다.
“본 공자가 저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오?”
“물론이오. 그는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독(毒)을 쓰는 바람에 죽은 것이오.”
“귀하는 잘못 생각하고 있구려. 중독이 되었다면 산 사람보다 죽은 시신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법이오. 헌데 저 사람에게는 전혀 중독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어찌 귀하는 중독되어 죽었다고 그러는거요?”
“독에 대해 내가 어찌 귀하와 비교할 수 있겠소? 짧은 식견이오만 한마디하겠소. 중독되었다 해서 모두 시퍼렇게 변색되거나 피를 토하는 것은 아니오. 독이던 약이던 어떤 사람에게는 몸을 이롭게 하는 약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오. 더 나아가 내가 보기엔 저 자는 분명 중독되어 죽었음을 알려주고 있소.”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이오?”
“상처가 났을 때 바르는 금창약(金瘡藥)에는 지혈(止血)하는 효과가 있소. 만약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금창약과 반대되는 약이나 독을 쓰면 어떻게 되겠소?”
제단에 기대어 죽어있는 흑의인의 사인(死因)은 과다한 출혈(出血)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피는 그가 앉아있는 바닥에 홍건하게 흘러나와 있었다. 그 피를 가리키며 청년이 말을 이었다.
“사람의 피는 시간이 흐르면 굳게 되어 있소. 헌데 이 자는 피가 굳지 않아 계속 출혈이 되었고 또한 바닥에 흘린 피 역시 아직까지 굳지 않고 있소.”
아마 이 흑의인은 상처가 깊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휴식을 취하려 했으나 지혈이 되지 않게 하는 독으로 인해 그의 상처에서 서서히 피가 빠져 나와 죽은 것이다. 죽은 이는 아마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휴우… 귀하의 눈은 너무 예리하구려. 이 사람은 한 가지 잘한 일이 있고, 한 가지 잘못한 일이 있소. 헌데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한 가지 일이라 그것을 잘했다고 해야 하는지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지 본 공자도 판단할 수 없었소.”
그 말은 흑의인이 그의 기이한 독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잘못한 일 때문에 죽였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이 잘한 것도 되고 잘못한 것도 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청년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 한 가지 일이란 그가 바로 이곳에 온 일이겠구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오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온 것이니 잘못한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둥그런 철패가 있음을 알리고 이곳까지 나를 유인해 왔으니 그것이 잘한 일이 아니겠소?”
그 말에 오독공자 남화우는 무릎을 탁 쳤다.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대단하오. 귀하는 본 공자를 만박거사(萬博居士) 구효기(具嚆奇) 이래 두 번째로 탄복하게 만든 사람이오.”
그는 말과 함께 갑자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두 눈에도 언뜻 살기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는 주의해야 할 부류의 인물들이 간혹 있소. 귀하같이 상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만 상대의 심중을 꿰뚫고 있는 사람도 그 중의 하나요. 누구나 귀하 같은 사람을 적으로 두면 항상 불안할 것이오.”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고맙구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면 적이 아닌 친구로 만들면 되지 않소?”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렇다면 귀하는 죽은 저 사람이 귀하에게서 빼앗으려했던 둥그런 철패를 본 공자에게 보여줄 수 있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는 품속에서 용(龍)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환혼(還魂)이란 글귀가 써 있는 철패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초혼령이었고, 그것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청년은 물론 지금 죽어있는 흑의인을 추적해 온 담천의였다.
“본 공자가 자세히 보아도 되겠소?”
말은 살펴 볼테니 건네 달라는 의미였지만 누가 들어도 내놓으라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허나 그 속뜻을 모르는지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이며 서슴없이 초혼령을 남화우에게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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