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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0여년간 폭력과 성학대에 시달려온 최경주(가명, 여)씨가 남편을 칼로 찔러 사망케 한 사건이 있었다. 또 지난 5월, 대구에서는 남편으로부터 상습적 폭행을 당한 김아무개(47세, 여)씨가 남편을 살해하였다. 8월, 역시 남편의 상습적 폭력에 시달리던 이지선(가명, 여)씨는 어린 딸을 성추행한 남편을 살해하고 자수하였다. 폭력피해 여성들이 남편을 '살해'하는 사건은 끊임없이 신문 지상을 오르내린다.

일반적으로 여성범죄자는 남성범죄자에 비해 적고, 경미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청주여자교도소의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여성범죄자의 1/2이 살인범이며 그중 1/2이 남편을 살해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편 살해범의 83%는 학대를 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 2004년 12월 15일. "가정폭력 피해여성의 살인 vs 정당방위, 여성에게 생존의 권리는 없는가?"
ⓒ 김정혜
법무부 용역으로 여성살인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김영희 교수(충북대학교 아동복지학과)는 지난 15일 서울여성의전화가 개최한 토론회 '가정폭력피해여성의 살인 vs 정당방위, 여성에게 생존의 권리 없는가?'에서 이와 같이 밝히고, 남편을 살해한 폭력피해 여성들이 공정한 판정을 받지 못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남편살해 여성 중 유기징역을 선고받은 94명은 평균 10년형을, 36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사형수도 1명 있었다. 83%가 학대경험이 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지나치게 높은 형량이다.

김영희 교수는 "남편으로부터 학대받은 여성들의 경우 심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본인의 행동이 남편 살인이라는 결과를 빚어낸 사실 자체가 외상(trauma)이 되어 이성적인 판단이나 대화 능력이 결여된 채 수사과정에 임하게 되고, 사형 판결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자포자기해 조사에 의미를 두지 않고 형식적으로 응답"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들은 왜 피하거나 신고하거나 이혼하지 않고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일까? 한 재소자는 4번 정도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집안 일이니 잘 알아서 하라'고 그냥 가버리거나 남편이 설득시켜 경찰을 돌려보내곤 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우호적인 경찰의 대응은 남편의 폭력을 더 가중시켜, 경찰에 신고한 후에는 남편의 폭력이 심해졌다고 한다.

남편의 학대를 피해 집을 나온 적이 있는 경우는 50%나 되고, 이혼을 요구한 사례도 62%나 된다. 하지만 자녀에 대한 연민, 이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보복 위협, 자녀와 친정 식구에 대한 가해 위협 등이 학대관계를 떠나려는 이러한 시도들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다고 한다.

발제자로 나온 이명숙 변호사는, "미국의 경우 1976년부터 2000년까지 남편살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국가가 형사법적으로 적극적 개입을 시작한 후부터의 변화"라고 지적하며, "피난처, 긴급전화, 법률상담 및 구조 등이 늘어나면서 학대받는 여성들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정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피해자를 가해자로 탈바꿈시키는 비극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참가자들은 남편을 살해하는 폭력피해 여성들의 행동에 정당방위를 적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정당방위이론은 힘이 대등한 두 남자의 대결상황을 가정하고 성립된 이론이기 때문에, 물리적 힘의 차이가 있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습적인 폭행에 시달려온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상당한 심리적 억압마저 갖게 된다.

정당방위의 성립요건인 '침해의 현재성'과 '방어의 상당성'은 폭력이라는 침해가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방어할 것을 요구한다. 아내는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이를 제지하여야 하며, 그것도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을 만큼만 하여야 한다.

남편과 거의 대등한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들 여성이 당하는 남편의 폭력은 상습적이며, 이들은 한 공간에서 생활하여야 한다. 남편이 폭력을 잠시 중단하고 있더라도, 아내에게는 폭력이 진행중인 것과 다름없다. '현재성'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한편 토론자로 참석한 정희진 서강대학교 강사는 폭력피해 여성을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환자'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합리적인 남성'이라도 지속적이고 무력한 폭력에 동일하게 노출된다면 폭력피해 여성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고, 그것은 정상적인 대응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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