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선물은 무슨? 당신에겐 2만 호주달러의 빚이 있다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사랑이다. 장난감이나 옷가지 등이 더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자녀들에게 선물 사주는 것을 자제하라. 아울러서 호주 국민 1인당 2만 호주달러 씩 빚지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마라." (피터 코스텔로 재무상)
“크리스마스는 잠깐동안 왔다가 갈 뿐이다. 그러나 크레디트 카드 청구서는 해결될 때까지 당신의 거실에서 버티고 있을 것이다."(존 하워드 호주 총리)
“크리스마스에만 선물하는 습관을 버려라. 그 돈을 나누어서 1년 동안 선물하라. 1년 내내 웃음이 당신의 가정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존 앤더슨 호주 부총리)
지난 12월 초부터 시작된 호주연방정부 정치지도자들의 '크리스마스 가정경제 충고 시리즈'를 발표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다 여러 경제전문가들과 언론논객들이 '2004년 크리스마스 경기'에 관한 비관적인 칼럼을 보태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의미'를 언급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자선단체의 입장표명도 이어졌다.
급기야 채널 10의 <로브 라이브>를 진행하는 코미디언 로브는 캐럴 '우울한 크리스마스(Blue Christmas)'를 다음과 같이 불러서 침체된 호주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패러디 했다.
돈(그대) 없는 우울한 크리스마스
난 돈(그대)을 생각하며 참 우울할 겁니다
I'll have a Blue Christmas without money(you).
I'll be so blue thinking about money(you).
기록적인 무역적자와 늘어나는 외채
호주는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불황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며 지내왔다. OECD국가 중에서 불황을 모르며 지내온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호주였던 것. 이는 '신자유주의'를 고집스럽게 신봉하면서 국가의 모든 정책을 '경제 우선' 위주로 밀어붙인 존 하워드 호주 총리의 공이라는 게 호주국민들의 평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도 생기는 법. 존 하워드 총리가 경제우선정책으로 나라살림을 꾸려오는 동안,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사회보장제도가 후퇴하면서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더욱 곤궁해졌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 그룹'인 소수민족, 장애인, 미혼모 등 국가로부터 보호받던 서민들의 혜택의 폭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또한 평등에 기초한 호주의 전통적인 분배구조가 깨지면서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탄탄했던 호주경제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은 호주달러의 강세와 오랜 가뭄의 영향으로 농업부문이 약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신용 카드 부채와 주택 및 개인융자의 급증으로 가계부채가 크게 늘어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11월 29일에 발표된 호주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7~9월의 기록적인 무역적자의 영향으로 호주의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 여파로 외채총액이 4천억 호주달러에 달해 호주국민 1인당 2만 호주달러씩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치 지도자들이 나서서 국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당부하게 된 것. 더구나 가계지출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적절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호주경제가 더 오랫동안 침체의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의 표명이기도 하다.
문제는 불과 두 달 전의 총선기간 때만하더라도 '하워드 정부야말로 호주경제를 책임 질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들이 선거에서 이기자마자 국가경제 위기론을 들고 나오면서 내핍경제를 당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9년 동안이나 연임한 하워드 정부는 '경제정부'를 내세운 네거티브 전략으로 노동당을 누르고 선거에 이긴 입장이서 갑자기 바뀐 경제상황을 해명하는 게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쯤 되자 호주언론들은 "하워드 정부가 나쁜 경제전망을 은폐하면서 선거를 치렀고, 무려 660억 호주달러가 소요되는 실현불가능 한 선거공약을 남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면서 하워드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피터 핸디 호주상공회의소 소장은 호주국영 ABC-TV와 가진 인터뷰에서 호주정부의 크리스마스 캠페인에 대해 "소비가 위축되면 국가경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며 볼멘 소리를 냈다.
장면2.‘조용한 크리스마스’이끄는 시드니 시장
작년까지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드니의 거리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답게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휘황찬란했다. 매년 CNN이 뽑는 '크리스마스 도시'에서 런던 뉴욕 파리 등과 함께 선두경쟁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올해의 시드니의 크리스마스풍경은 영 딴판이다.
2004년에 시장으로 취임한 크로버 무어 시장이 자청해서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선언해 버린 것. 독신여성인 무어 시장은 시 당국의 크리스마스 장식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성탄은 휘황한 불빛으로 축하하는 게 아니다"라며 "더구나 시드니는 200여 인종으로 구성된 다민족사회로 종교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매년 시드니 시청 앞에 세워졌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는 작은 가게에나 어울릴 듯한 규모로 축소됐고, 하이드 파크와 조지 스트리트의 거리장식도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초라해졌다.
사정이 이쯤 되자 크로버 무어 시장의 크리스마스 긴축정책을 놓고 호주에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딴지'를 걸고 나왔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어디로 사라졌나?('Where's Our Christmas?)'라며 '축제 대실패(festive fiasco)'라고 빈정거렸다.
2UE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한 부르스 제킹스는 "크리스마스는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다, 어른들의 경제가 어렵다고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추억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항변했다.
크로버 무어 시장의 '조용한 크리스마스'는 뉴사우스웨일즈 관광청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알랙스 맥그리거 홍보실장은 "크리스마스가 포함된 12월과 1월은 시드니에 관광객이 가장 많이 오는 피크타임"이라며 "장식예산을 늘려서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를 해야할 시드니 시청이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장면3. 혼자 크리스마스를 맞는 '위기의 남자들'
'조용한 크리스마스'는 대목을 기대하는 상인들이나 시드니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풍경을 기대한 관광객들에게만 불만스런 게 아니다. 홀로된 외로움을 처절하게 겪어내야 할 남자들에게도 정말 피하고 싶은 때다.
연인과의 결별이나 이혼 등으로 2004년의 크리스마스 시즌을 '나 홀로 휴일(holyday alone)'로 지내야할 사람이 5만명이나 된다. 이 숫자는 그동안의 누계가 아니고 올해에 새롭게 생겨난 '위기의 남자들'의 숫자다.
<남자들의 라인(Mensline)>이라고 이름 붙여진 호주 전화상담서비스의 테리 멜빈 팀장은 12월 12일 <시드니모닝해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상담원들이 크리스마스시즌 동안에 걸려올 수많은 전화를 상담하기 위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12월 17일 오후, 기자는 멜빈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가지 궁금한 사항들을 물어보았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2004년 한 해동안 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홀로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크리스마스시즌은 전통적으로 식구들과 함께 하는 기간이다. 그래서 더욱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더구나 처음으로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남자들은 깊은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올해엔 얼마나 많은 전화를 받았고, 주로 어떤 내용인가?
“올해에만 10만 명 이상이 전화를 걸어왔다. 지난 해보다 30% 정도 증가한 숫자다. 그들의 가장 큰 고통은 자녀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대화가 자녀들에 대한 내용에 이르게 되면 울먹인다.”
-어떤 식으로 상담하고 위로하는지 궁금하다.
“우린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지 1년 중의 하루일 뿐이라고 말해준다. 크리스마스에 집착하지 말고 1년 내내 자녀들과의 끈끈한 유대를 이어가야 한다고 충고해준다.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상담시간은 어떻게 되며, 상담은 누가 담당하는가?
“상담은 365일 24시간 내내 계속된다. 특히 심야에 걸려오는 전화는 아주 신중하게 대처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라인>은 소수의 직원과 다수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이전에 상담을 받았던 사람들이 아주 많다.”
정치지도자들이 나서서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에 '선물비를 아낄 것'을 권유하고, 시드니 시장은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내세우며 크리스마스 장식을 거부하고, 5만명의 '위기의 남자'들이 홀로된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호주의 크리스마스.
수영복을 입은 산타클로스가 서핑보드를 타고 찾아오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는 2004년의 시드니는 이래저래 쓸쓸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