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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에는 푸른 들녘이 펼쳐진다

한해의 끝은 항상 아쉬움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조용한 객석에서 느끼는 허허로움만큼이나…. 충만하게 채워져야 할 마음 속이 뭔가 텅빈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한번씩 새로운 시작을 위한 떠남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저물어 가는 한해의 끝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남도의 땅끝 해남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곳에는 겨울이 되어도 푸르름이 있어 희망을 느낄 수 있고, 찬바람 속에서도 따스하게 속살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아늑함이 있다. 그래서 고난스런 세상사 속에서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열망을 안고 돌아갈 것이다.

목포를 지나 해남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낙지가 많이 나와 이두낙지로 유명한 산이면이나 진도로 이어지는 옛 목장(牧場)의 화원면, 공룡의 세계가 펼쳐지는 황산면을 지나면 커갈수록 더욱 푸른 겨울 배추를 만난다.

▲ 겨울을 보내는 월동 배추
ⓒ 정윤섭
이곳은 해남의 겨울배추 주산지다. 나지막한 구릉지 황토밭에 펼쳐지는 겨울배추를 만나면 겨울은 이미 겨울이 아니다. 허리가 휘도록 밭을 일구던 농부들은 다시 겨울배추에 새로운 희망을 심고 있다.

산이면이나 화원면 일대 기름진 황토 들녘 야트막한 구릉 어디를 가도 연초록 융단 같은 배추밭이 끝도 없다. 해남은 전국 최대의 월동배추 주산지다. 겨울에 눈비 맞고 자란 겨울배추는 김치를 담가도, 배추 한 포기를 뽑아 삼결삽을 싸 먹어도 달디단 입맛을 살갑게 돋운다.

겨울이 되어 더욱 푸른 땅끝 해남, 눈 덮인 겨울배추가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해남의 겨울은 푸르다. 바닷가의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뾰족한 줄기를 하늘로 키워내고 있는 마늘밭이 푸르다. 시골의 꼬부랑 할매가 쭈그리고 앉아 겨울 바람 속에서 캐는 시금치 밭도 푸르다. 이제는 수매가 되지 않아 점점 그 기운을 잃어 가는 보리밭도 아직은 푸르다. 남쪽 양지의 언덕 아래 텃밭에서 엉기성기 자라는 곰방부리도 더욱 푸르다.

푸석푸석한 황토길 따라 보리밭 끝없이 이어지는 남도의 들녘, 이제는 황토길 대신 아스팔트와 시멘트 길이 더 많아졌지만 그 남도 길의 땅끝 겨울은 푸르다. 아스팔트 위를 걸어 걸어 땅끝으로 가다보면 푸른 겨울이 그렇게 나타난다.

아주 오래 전, 정변의 회오리 속에서 물러난 어느 선비가 유배길을 떠나거나 찬바람 몰아치는 엄혹한 시대 속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이곳 땅끝으로 땅끝으로 내몰려 왔던 정객들과 시인들. 그때도 땅끝의 겨울은 푸르렀다.

황토길을 달려 달려 지나면 바닷가가 나온다. 그 어느 바닷가를 지나다가 만나는 해안의 들녘도 푸르다. 그렇게 겨울 바람이 시린 땅끝은 겨울이 되어도 더욱 푸르다. 땅끝의 남쪽 쪽빛 다도해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훈풍은 뼛속까지 시려 추위에 움츠러든 나그네의 마음을 겨울바람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해남은 삼면이 바다다. 바다로부터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이 몰려왔다. 새로운 문물이 몰려오고 문화가 몰려오고 때론 먼 곳의 왜놈들이 몰려와 분탕을 치고 달아나 슬픔도 몰려왔다. 남녘 바다로부터 밀려온 훈풍이 가장 먼저 대륙으로 들어오는 출입구, 그 바다의 들목은 푸르다.

만삭된 어미의 배처럼 막 봉우리를 터트리는 미황사·대흥사 동백꽃, 루즈 바른 스무살 가시나의 입술보다 붉은 동백꽃은 짙푸른 잎으로 더욱 더 푸르다.

두륜산, 달마산 후박나무도 푸르다. 두륜산 산자락 여기저기에 넓게넓게 잎삭 진 나무들 속에서 숲 속 군집을 이룬 후박나무는 겨우 내내에도 푸르디 푸르다. 지조를 지켜 푸른 선비가 산다는 녹우당, 녹우당 뒷산 덕음산의 비자나무는 골짜기에서 홀로 푸르다. 푸른 소나무 숲에서도 비자나무는 홀로 가지를 높이며 푸르디 푸르다.

궁벽한 땅끝에는 아픔이 있다

▲ 땅끝 앞의 바다와 섬
ⓒ 정윤섭
한반도 육지부의 땅끝 해남, 옛날에는 이곳을 남쪽의 궁벽한 곳이라 하여 침명(浸溟)이나 투빈(投濱)이라 불렀단다. 이는 그만큼 고립되고 궁벽한 이곳을 표현한 말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땅을 오래 전부터 먼 유형의 땅으로 상상하곤 하였다.

바다와 바다가 만나고 다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해남, 삼면이 바다로 쌓여 있어 육지와 해양의 통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다양한 문화의 통로였다. 중국, 한국, 일본을 연결한 문화의 이동로인 이 바다는 그러나 어느 해 왜구의 침탈로 인한 수난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였다.

"거기에는 뜻 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 없는 도공, 이름 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 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답사 일번지'로 해남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저항하였다. 왜구의 침탈에 맞서 끝까지 해남성을 지킨 을묘왜란(일명 달량진 사변)에서부터 명량대첩과 동학혁명, 한말 의병, 3·1독립 운동, 5·18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신명을 다해 저항하였다.

▲ 땅끝으로 가는 영전일출
ⓒ 정윤섭
의로움을 향한 시대에의 저항, 그 시대를 위해 시인들은 시를 썼다. 피를 토하듯 살아가는 시인들이 시를 썼다. 녹우당을 지킨 선비 윤고산도, 암흑의 시대를 목숨으로 저항한 김지하도, 혁명을 꿈꾸는 세상으로 노래한 김남주도, 이땅 여성들의 평등 세상을 위해 강물에 몸을 맡긴 고정희도 모두 이 땅끝 황토 위에서 시를 썼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한 처절함 때문이었을까, 시대를 가장 아프게 살다간 한 전사의 삶. 스스로 시인이기보다는 차라리 민중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전사이기를 바랬던 김남주 시인.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가장 슬픈 레지스탕스였다. 이 땅의 핏빛 황토와 바람에 대한, 그리고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부조리에 대한 저항자였다. 이 땅은 이들을 키웠고 세상의 모든 부조리한 것들에 부딪히고 저항하다 어느 순간 강물에 섞여 버렸다. 강물에 떠밀려 이 땅의 바람과 흙 속에 섞였다.

김남주와 함께 같은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간 시인이 고정희다. 두륜산 계곡물이 흘러내려 마을 앞으로 넓은 삼산벌을 만들고 있는 송정리에서 태어난 고정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 동네인 봉학리의 김남주와 함께 같은 시대에 서로 닮은 생애를 살다 간다.

그녀보다 더 가슴 저리게 여성해방주의자로 또 자신의 실존에 대한 열렬한 탐구자로서 살다간 이가 또 있을까. 김남주와 고정희는 둘 다 삼산면 출신이라는 것과 가까운 80년대를 치열하게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다 짧은 생을 마쳤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 고천암의 아침 철새
ⓒ 정윤섭
오 하나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그녀의 말처럼 고정희는 어느날 갑자기(1991년 6월 지리산)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이었다. 이들 또한 고향땅인 삼산벌의 바람과 황토흙 속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으로 내몰린 자들과 유형의 땅이던 땅끝은 이제 겨울이 되어 더욱 푸르다. 드넓은 고천암 벌판 위로 가창오리 철새들이 나르고, 겨울배추, 마늘, 시금치 푸른 땅끝 해남은 겨울이 되어 더욱 푸르다.

땅끝에 서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 땅끝 전망대의 김지하 애린시비
ⓒ 정윤섭
땅끝 바다 앞에 서면 누구나 깊은 회한에 잠긴다. 김지하의 애린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국토의 막내둥이 더 이상 갈 수 없는 이 국토의 끝에서 때론 절망으로 그러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게 된다.

땅 끝에 서서/ 더는 갈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 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이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 나 <애린/ 김지하>

땅 끝에 서면 김지하의 애린이 생각난다. 가슴속이 저리도록 시린 세상일 다 팽개치고 이 땅끝에 서면 저물수록 아름다운 이 땅끝을 보면 애린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렇게 이 땅끝에서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묻는다.

멀리 보길도, 그리고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섬들, 이곳에 서면 무망한 섬들을 향한 동경과 아련한 향수가 지나간 시절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으로 되살아난다. 국토의 종착이 아닌 대륙을 향한 출발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새롭게 시작을 다짐해 보는 것이다.

▲ 땅끝에서 보는 바다. 멀리 섬은 보길도
ⓒ 정윤섭
땅끝 사자봉 높은 언덕 마루에서 바라도 보이는 보길도는 고산의 고적함이 생각나 눈물겹다. 때론 세상을 등지고 살고픈 그네의 생각에, '어기여차 어기여차 배 저어라 배 저어라' 고산의 '어부사시사'가 생각난다.

한 시대의 묶음에서 가장 위에 섰던 김지하는 지난 시절 이 땅끝에서 자신의 지치고 으깨진 심신을 달랬다. 그가 은둔자처럼 이곳에 왔든 아니면 발길 닿는 곳 속에서 해남에 머무르게 됐든 그의 마음을 결정짓게 했던 것은 이 땅끝의 황토와 바람이기도 하다. 그때 그가 머물렀던 서림시절과 땅끝은 실연한 자의 도피처가 아닌 고향의 편안함이 그의 영혼을 쉬게 해주었다. 그만큼 이땅의 바람과 황토는 지친 순례자들의 아린 가슴들을 포근하게 쓸어 안아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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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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