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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프라이버시에 민감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프라이버시를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휴대전화로 상품 구매 요구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강력히 항의해 오던 사람이라면 이 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더 민감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주민등록번호만 봐도 그렇다. 그 번호에 자신의 성별, 생년월일, 출신지의 정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관리자의 편의를 고려한 숫자조합일 뿐 대상자의 사생활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CCTV를 피해서는 단 1리도 가기 어렵다
우리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우려는 단지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신상정보에 머물고 있지 않다. 공리주의 철학자 벤덤이 구상한 원형감옥 '팬옵티콘(수용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만든 원형감옥)'은 현실세계에서 좌절되었지만, 정보사회를 맞아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그것도 감옥의 울타리를 넘어 시민 생활 곳곳에까지 마치 친근한 벗마냥 자리를 잡으면서 말이다.
대표적으로 CCTV가 있다. 옛날 만석꾼 부자는 자신의 땅만 밟고도 100리나 간다고 하는데, 나는 CCTV를 피해서는 단 1리도 제대로 가기 어렵다. 출근길에 불과 10m도 가기 전에 CCTV를 맞이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20년이 넘은 아파트라 근사한 경비시설과는 거리가 먼데도 CCTV는 이런 오래된 아파트단지라 해서 외면하는 법이 없다.
지하주차장이 없어 자리잡기 어려울 듯 보이던 CCTV는 엘리베이터 구석진 곳을 기어이 찾아들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어느 누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줌을 누었다느니, 누가 술 먹고 토했다느니 하는 건 옛말이 되었다. 며칠 뒤 버젓이 CCTV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CCTV가 설치되기 전에는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면 간단히 목운동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목을 돌리다가도 CCTV와 마주치게 되면 괜히 멋쩍어진다. 연일 귀가가 늦어지면 어느 누가 '저 집 남편은 항상 늦네'하는 소리를 할 것만 같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라이언은 "감시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CCTV도 예외가 아니다. 범인을 검거할 때는 진가를 발휘하지만, CCTV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나 뒤통수가 간지럽게 마련이다.
우리는 '편리'에 익숙해져 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에서 비롯되는 삶의 질 향상에만 환호를 보낸다. 그 폐해는 환호성이 잦아들 즈음에서야 공론화되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편리에 따른 기대의식으로 우리들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뒤이다. 그러나 편리는 아무런 대가없이 얻을 수 없다. 다만 그 달콤함에 젖어 이성의 방어기제가 허술해져서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엘리베이터의 CCTV를 원래 설치 목적대로만 사용할 것인지, 또 촬영정보가 극히 제한된 조건에서만 일정한 절차를 거쳐 열람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불안하게 CCTV 아래 내 몸을 밀어 넣는다.
한 개인이 설치한 지하주차장 CCTV
CCTV는 단체나 조직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개인들도 마음껏 설치하고 있다. 우리 아파트단지에서 어느 차를 보고 사람들이 수군댄다. 새로 산 비싼 차에 누가 흠집을 낸 모양이다. 그 뒤로 차 주인이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을 향해 CCTV를 설치한 것이다. 아이들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 그 차에 손이라도 대면 괜히 신경이 쓰인다.
벤담의 감시체계는 중앙 감시탑 방식이었으나, 이제는 무수히 많은 개인과 조직이 각자 감시탑을 광범위하게 퍼뜨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출근할 때에도 그 차 옆을 지나면 그 순간 나를 비추고 있을 CCTV를 의식하게 된다. 어찌됐든 개인이 다른 개인의 정보를 취합하는 것인데, 이게 합당한지 도대체 판단이 서지 않는다.
내 정보를 국가가 취합한다면 국가를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면 되겠지만 무수히 많은 개인들이 정보를 취합한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부잣집 담을 둘러싸고 있는 CCTV는 0%에 가까운 범죄자만이 아니라 100%에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을 열심히 찍고 있으리라.
지하철역 CCTV는 더 큰 조직이 설치해 더 많은 시민들을 상대로 하고 있다. 예전에 아이와 함께 백화점 전자매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들의 모습이 나오는 모니터를 보면서 아이와 즐거워한 기억이 있다. 그때야 제 의지에 따라 노출하는 것이기에 즐겁게 웃을 수 있지만, 지하철 CCTV에 자신의 모습이 나온다 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저 정보는 누구가 관찰하며, 관리나 열람 규칙은 제대로 있고 또 지키는지 궁금해진다. 지하철 플랫폼이나 개찰구를 향하고 있는 CCTV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하루의 정신건강에 좋으리라.
CCTV는 회사 앞 편의점 내에서도, 회사의 비상계단이나 엘리베이터에서도 쉽게 만난다. 간혹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그때마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놓고 있는 CCTV에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 출퇴근이나 업무로 이 CCTV 앞을 지날 때에도 나는 당당함을 잃고 만다. 정보가 어느 일방으로만 흐르는 불평등과 그 정보 이용에 대한 불신이 위축을 부르는 것이다.
빅 브라더는 일상에 있다
점심시간에 은행의 무인 현금인출기를 이용할 때면 '무인'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설경구와 전도연이 주연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영화를 보면 여주인공인 원주가 현금인출기 앞에서 은행원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은 '무인' 앞에서 그저 거울 앞 독백을 한 게 아니다. 숙직을 하던 은행원이 녹화 화면을 되돌려보다 결국 여주인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CCTV를 지켜볼 것이라고 단정하는 여주인공이나 심심풀이로 녹화 화면을 뒤적이는 남주인공이나 우리 시대 개인정보 불감증을 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라 얘기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나는 현금인출기 앞에서 머리 손질하거나 이빨 고춧가루를 검사하는 우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
퇴근할 때에도 오전에 마주한 CCTV에 또 내 삶을 기록하며 집에 도착한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CCTV를 만나는지 알지 못한다. 보통의 CCTV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그 많은 CCTV의 존재를 의식해서는 내 정상적인 생활이 지장 받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RFID(전자꼬리표)가 상용화되고, GPS(위치측정시스템)를 이용한 프라이버시 침해를 다룬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가 현실이 될 수 있는 시대에 CCTV의 침해는 하찮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CCTV가 하찮아 보일 때 뒤이어 나타나는 더 큰 문제도 하찮아 보일 것은 자명할 것이다.
달은 항상 우리에게 앞면만 보여준다. CCTV나 GPS 역시 우리는 달처럼 앞면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뒷면을 보지 않고서 사물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FBI의 도청장치인 카니보어(인터넷 패킷을 가로채는 소프트웨어)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2000년 6월 미국의 한 시민단체의 정보공개 요구 때문이었다.
나 역시 뒷면을 보고 싶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CCTV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제 '빅 브라더'는 절대 권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 그리고 도처에 산재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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