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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 우리의 모교는 안타깝게도 학교 이전으로 폐교가 되어 잡초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입을 대고 마시고 장난치고 놀던 수돗가 / 박제된 추억처럼 수도는 남아서 우리의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 우리의 모교는 안타깝게도 학교 이전으로 폐교가 되어 잡초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입을 대고 마시고 장난치고 놀던 수돗가 / 박제된 추억처럼 수도는 남아서 우리의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었습니다. ⓒ 김완태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 우리가 뛰어놀던 운동장은 비록 풀밭으로 변해 있었지만, 우리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던 플라타너스는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 우리가 뛰어놀던 운동장은 비록 풀밭으로 변해 있었지만, 우리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던 플라타너스는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 김완태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 학교 옆 감나무는 추억을 매달고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 학교 옆 감나무는 추억을 매달고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 김완태
더 이상은 과거 속에 묶어둘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고향을 배경으로 꿈에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동무들….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서 병이 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몇몇 친구들이 용기를 내어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카페가 개설되자마다 어떻게들 알았는지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채팅과 이메일, 그리고 전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오래된 가뭄을 해갈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제안했는지 올해가 가기 전에 얼굴 좀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번개하듯 우리는 갑자기 만났습니다. 막상 만난다고 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신경안정제까지 먹었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과연 어떻게들 변했을까? 옛모습이 남아 있기나 할까? 설마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니겠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듯 옛동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마포의 한 갈비집이었습니다. 춘천에서 산다는 순애는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왔습니다. 심장이 떨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뿐만 아니라 기차를 타고 오면서도 꿈은 아닌가 싶더라네요.

우리는 갈비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먹는 일보다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입술이 더 바빴습니다.
우리는 갈비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먹는 일보다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입술이 더 바빴습니다. ⓒ 김형태
우리가 만난 갈비집 2층은 마치 이산가족 상봉 장소 같았습니다.

"너 순애 맞지?"
"그래, 내 이름을 기억하는구나!"

서로들 반가움에 체통도, 위신도 집어던지고 악수하고 부둥켜안고…. 시장통을 방불케 했습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지만, 대부분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거의 변하지 않은 얼굴도 있었고, 어린 시절의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나 몇 명은 정말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였던 우리들이 갑자기 중년의 어른이 되어 만나니, 말을 놓아야 하는지, 높여야 하는지 어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시골뜨기 코흘리개들이 23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어느새 신사 숙녀, 아니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만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어디 사느냐, 무엇을 하느냐, 애는 몇이냐, 안부 묻기에 바빴습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종로경찰서장 역할을 했다는 봉기, 공부 잘했던 명중이는 최고 명문대를 나와 공인회계사를 하고 있었고, 원개는 전공을 살려 도서관에 근무하고 있었고, 나처럼 교편을 잡은 친구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자영업을 하는 친구, 의사, 공무원, 회사원, 전업주부…. 모두들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한 일들을 하며 꿋꿋이 이 나라를 떠받드는 기둥이 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23년만에 만난 옛 동무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해맑게 웃어보았습니다.
23년만에 만난 옛 동무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해맑게 웃어보았습니다. ⓒ 김형태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소식과 안부를 묻는 등 이야기꽃을 피워내느라 아까운 고기가 까맣게 타는 줄도 몰랐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서로의 안부를 어느 정도 확인하자,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타임머신을 타고 23년 전, 아니 거의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린 아이들처럼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놀부, 너 이 자식!"
"왜 그러냐? 이 오토바이야"
"네가 우리들 고무줄 얼마나 많이 끊은 줄 아냐?"
"내가 그랬나?"

'놀부, 오토바이, 오줌싸개, 배꼽장이' 등 이름 대신 별명이 부활했고, 제비울, 천동리, 욕골, 당골, 수락리 등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 마을의 이름들이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책상 가운데 금을 긋고 짝이 넘어오면 실랑이를 하던 일, 포크댄스 시간에 선생님은 남녀가 쌍을 이루어 손을 잡으라고 했는데, 막대를 구해 그것을 잡고 춤을 추다가 혼났던 기억, 남 몰래 마음에 넣고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 했던 풋사랑…. 초등학교 때는 동네 여자애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하고 지내다가 중학교 올라가면서 누가 내외하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등하교길에 만나도 서로 모른 척 외면했던 일….

사춘기라서 그랬나?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인데, 그때는 자못 심각했었다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선생님들 이야기, 고무신 이야기, 소풍 이야기와 단체로 보리 베기, 모심기, 솔방울 따러 다녔던 추억….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로 옮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맥주 한 잔 들고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맥주 한 잔 들고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 김형태
2차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끝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대전에서 갓 올라온, 아직 서울물이 들지 않은 토박이 영종이의 말씨였습니다.

"서울살이가 왜 이렇게 대간하냐?" "아줌마, 오늘은 건겅이가 뭐대유? 멀국이 참 맛나네유!" "아가씨, 참말로 욕 봤어유!"

'깔막지다, 거시기하다, 대간하다, 건겅이, 멀국, 욕보다' 등 우리가 어렸을 때 공기를 호흡하듯 듣고 쓰던 그 충청도 사투리가 왜 그렇게 이색적으로 들리던지, 우리는 한참 동안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우리를 서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붕어빵을 하나씩 들고 그렇게 추억을 곱씹었습니다.
우리는 붕어빵을 하나씩 들고 그렇게 추억을 곱씹었습니다. ⓒ 김형태
빡빡한 서울살이를 하다가 모처럼 어릴 적 옛친구들을 만나니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했습니다. 아니 겨울밤 추위를 모를 정도로 가슴들이 따끈따끈해졌습니다. 붕어빵을 하나씩 손에 드니 정말 추억 속으로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신선놀음도 아닌데 낮 1시에 만난 우리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오늘 채워지지 않은 아쉬움은 다음에 채우기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만큼 앞으로 더욱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옛 선생님을 찾아 사은회도 한 번 갖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성탄트리는 더욱 아름답게 보였고, 불빛 또한 별빛처럼 밝아보였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별들이 되기로 약속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별들이 되기로 약속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 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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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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