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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태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핸드폰 소리다.

"여보세요?"

"너 어떻게 된 겨?"

어머니의 목소리다.

"왜요?"

"왜요라니! 오늘 선보기로 한 거 몰러?"

"제가 어렵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소린 그만 혀고, 너 시방 거기가 어디여? 빨리 와야 할 거 아녀."

"안돼요 어머니, 못 가요. 취소하세요. 여기는 지금 아산방조제……"

"아이구, 내가 못 산다 못 살어. 또 거길 간 겨? 거기 안 가게 하려고 맞선 잡아 놨더니 어느새… 하여간 빨리 와. 저쪽에는 내가 조금 기다려달라고 사정해 볼 텡게."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이미 늦었어요. 그리고 제발 이러지 좀 마세요.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야, 이놈아! 나는 너 장가가는 거 못 보면 눈을 못 감는다. 너 땜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나꺼정 죽는 걸 봐야 네가 정녕 속을 차리것냐. 당장 못 올라오냐!"

"알았어요. 지금 올라갈 게요. 그러나 기대는 하지 마세요. 다 소용없으니까. 제발 시간을 좀 더 주세요. 그러면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시간? 너 시방 시간을 더 달라고 했냐? 십 년을 넘게 줬으면 됐지 얼마를 더 줘 얼마를, 그리고 뭐 다 알어서 혀, 다 알어서 혀는 것이 고작 이거냐. 잔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 전화요금 많이 나오것다 올라와서 얘기하자."


'올해는 모처럼 충남 땅을 밟아보나 했는데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저 바다를 따라 휘 돌아가면 천수만이 바로 거긴데, 거기만 가면 초희를 혹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핸들을 돌려야 하다니…….'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다니는 물고기와 새들이 한껏 부러웠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천수만을 지척에 두고 다시 서울로 발길을 돌려야만 하다니, 아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실로 내가 아산 방조제를 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 때문에? 그때의 상처들을 들추어내기 싫어서? 그런 것인가? 정직히 말해 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 무얼까? 무엇 때문에 늘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방조제를 건너서 미친 듯이 달려가면 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하고 서울과 아산만을 왕복하고 있는가 말이다. 그래 내 마음 저 밑바닥에는 뭔지 모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두려움!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가?

초희, 그녀와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따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진정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이 나와 초희를 이렇게 가로막고 있단 말인가!

내가 나 자신을 모르겠다. 내가 내 자신을 모르겠어!'

이런 혼란을 거듭하며 나는 비에 젖은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곤죽이 된 진흙탕을 장화를 신고 비틀거리며 밟아대는 사람처럼 그렇게 질퍽-질퍽- 질퍽거리며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비! 비가 싫었다. 이제는 정말 비가 싫었다. 비가 오지 않는 땅, 그래 사막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사방팔방 거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막의 모래 위에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무엇인가 침묵 속에 환하게 빛나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리고 사막은 어디엔가에 오아시스를 숨겨놓고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고도 했지. 그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언제나 사막 저편에서 봄처녀처럼 웃고 있으니까.


서울로 되돌아온 나는 거의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는 다락방을 찾았다. 모서리마다 거미들이 덫을 놓고 잠복하고 있었다. 매캐할 정도로 먼지도 수북히 쌓여 손을 갖다 댈 때마다 그것들이 벼룩처럼 튀어 올랐다. 이곳저곳을 한참 뒤진 끝에 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초희의 유품! 그녀가 떠날 때 함께 버리거나 태우라는 것을 차마 그러지 못하고 서울로 가지고 올라와 한동안 그녀인 양 여기며 한 5년간 책상 밑에 놓고 끼고 살았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안 어머니가 당장 버리라고 성화가 대단하여 할 수 없이 다락방에 숨겨놓고 버렸다고 했다.

나는 다락방에서 내려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락방에서 대충 털어 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먼지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훅- 하고 다시 바람을 일으켜 그것들을 쫓았다. 그럼에도 꼼짝달싹하지 않는 녀석이 대부분이었다.

분홍빛 보자기를 풀었다. 그리고 상자를 열었다. 거기 초희의 분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반지, 시계, 손수건, 녹음 테이프, 가방, 모자, 장갑, 브로치, 팬시용품 등 액세서리 몇 점, 책 몇 권과 이런 저런 편지들, 습작시편, 그리고 사진첩과 일기장….

몇몇을 빼놓고는 대부분 내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들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이것들은 나의 분신이기도 했다. 처음 이 상자를 내가 받았을 때는 종이로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받는 사람의 주소와 성명이 씌어 있었다. 그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그녀는 아마 우편으로 나에게 이것을 보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포장까지 해놓고 우송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내가 이 상자를 건네 받은 것은 그녀가 떠나기 직전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상자 안의 물건들을 오랜만에 다시 보자, 마치 그녀가 부활이라도 한 것처럼 반가웠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와 부딪혔다. 그리고 그녀와의 추억이 아침해처럼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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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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