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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술 한 잔 하지.”
두 사람 앞에는 먹다 남은 계사면(鷄絲麪)이 놓여 있었다. 식성이 좋은 구양휘가 웬일인지 몇 젓가락 뜨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쭈욱 들이키는 것이다.
“나는 열여덟살이 되도록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어. 사실 술뿐이 아니었지. 음식도 항상 일정했어. 친구도 없었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도 만나기 어려웠지. 장손(長孫)이었지만 제사에 참석한 것도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열여덟에 아버님과 검을 맞대는 날 처음으로 술을 마셨어. 아버님이 따라 주시더군. 멋모르고 들이킨 술을 아버님의 옷에 모두 흩뿌려 놓긴 했지만 말이야.”
수련을 위해 그는 어린 시절 모두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가문을 위해 그를 그렇게 고련시켰을 것이다. 세상일이란 그런 것이다. 남들은 쟁쟁한 무림세가에서 태어났으니 부러워하겠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받았던 노력과 고통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합환주(合歡酒)를 마셔야 했지. 이미 정혼(定婚)이 되어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 날 처음으로 아내의 얼굴을 보았네.”
그는 잔을 들어 마시더니 시선을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객점의 창문 밖으로 만월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중추절(仲秋節)이다. 아마 그래서 구양휘가 이리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몸이 약한 사람이었지. 아이를 낳다가 죽었어. 그 뒤로 나는 집에 가본 적이 거의 없네. 그저 본가에 있는 곳을 지나다가 가끔 손님처럼 들렀지.”
사람에게는 누구나 아픔이 있다. 다만 내보이지를 않을 뿐이다. 구양휘는 구양가의 영광을 위하여 철저한 계획과 수련 속에서 키워낸 인물이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가문을 위하여 키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가문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강한 인물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어디든 찾아가 붙었지. 내 한계는 어디일까? 집안어른들이 만든 나는 어느 정도가 될까?”
담천의는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직 수련만을 위하여 바쳐진 십팔년의 세월. 그리고 그 뒤에 정을 붙이고자 했던 아내의 죽음. 그에게 남겨진 것이 무엇이었을까? 담천의는 자신의 술잔을 들어 들이켰다.
“헌데 기이한 것은 싸우면 싸울수록 고독해 지는거야. 주위에서 보는 눈은 어느새 경탄이 아니면 질시였어. 그럴수록 외로웠지. 외롭다는 것은 그 어떠한 것보다 참기 힘든 일이야. 그래서 친구를 사귀려했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형제가 되려했어.”
구양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술잔과 담천의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값싼 화주였지만 텁텁한 느낌은 없었다.
“그 덕에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살을 베어줄 수 있는 형제들도 얻을 수 있었지. 나는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있어.”
그는 씨익 웃더니 술잔을 들어 담천의의 술잔에 부딪혀왔다. 아마 같이 들자는 것일 게다.
“자네를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었지. 형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소제를 그리 생각했다니 고맙구려.”
담천의는 빙그레 웃으며 구양휘의 잔과 자신의 잔에 따랐다. 사람의 감정이란 어느 정도는 상대적이다. 자신도 구양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부류였지만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헌데 나는 자네를 몰라. 성하검 섭장천은 내가 한번쯤 꼭 붙어보고 싶은 사람이었지. 나를 가르쳤던 셋째 숙부가 그에게 패했다고 들었어. 아마 아까 그의 입에서 독비객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 관왕묘에 뛰쳐 들어가 그에게 검을 맞대었을거야.”
팔이 하나 없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패했을 것임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무림에서 갑자기 사라졌을 것이다. 이미 예기가 꺾인 그를 상대로 겨뤄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는 삼십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지. 헌데 그는 자네를 알고 있는 듯 하더군. 자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진 그가 자네를 어찌 알고 있을까? 또한 자네는 오늘 새벽 양만화의 장원을 휩쓸고 간 초혼령을 가지고 있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지?”
당연한 의문이었다. 누구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작 담천의 본인도 가지고 있는 의문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자네는 삼년 동안 만물표국의 표사로 있었다고 했어. 그래 서가화 말대로 만물표국이 용담호혈(龍膽虎穴)이라도 되나? 일개 표사가 풍운삼절을 요절내는가 하면 오독공자 남화우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성하검 섭장천 앞에서 그리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돼?”
누가 들어도 말이 안된다. 만물표국의 대주, 아니 중원제일의 표국인 산서표국의 총표두(總驃頭)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담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소제도 알 수 없소. 솔직히 소제가 더 알고 싶은 심정이오.”
그 말에 구양휘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판단하건데 담천의는 고의로 숨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왕 말이 나온거니까 한마디 더 하지. 나는 두 사람에게서 자네와 두 여자가 소림에 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받았네. 아니 분명히 이야기하지. 한 사람은 송하령 소저의 안위를 부탁했고, 또 한 사람은 자네를 부탁했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 천지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줄 사람이 있었던가?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면 여동생뿐이었다.
“누구요? 유탐화란 사람이오?”
구양휘와 팽악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유탐화란 인물을 이야기했었다. 송하령도 알고 있는 인물 같았다.
“그는 송하령 소저를 부탁했지. 자네를 부탁한 사람은 만박거사(萬博居士)네. 물론 그 분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숨겨 달라고 했지만 솔직히 이야기하기로 하지.”
이 무림에서 만박거사라 불리울 인물은 하나밖에 없다.
통천신복(通天神卜) 구효기(具嚆奇)
그는 외호에서 보듯 점쟁이이다. 하지만 그는 매우 특이한 점쟁이다. 그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에 벗어나면 점을 쳐주지 않는다. 그 첫 번째 원칙이 바로 무림인이 아니면 점을 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한번도 틀리지 않았다는 복술(卜術)보다는 무림사(武林事)와 무림인(武林人)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그를 만박거사(萬博居士)라 부르기도 했다.
“만박거사?”
그는 사실 이런 명호를 들은 바 없다. 조금 전 오독공자 남화우가 담천의를 만박거사와 빗대어 말한 것을 들은 게 고작이었다. 그가 누굴까? 그는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자신을 부탁했을까?
구양휘란 인물에게 무언가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중원 천지에 그리 많지 않다. 부탁한다 하더라도 그를 움직이게 할 사람은 더욱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사람으로 인하여 구양휘는 담천의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소제는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오.”
“이런 젠장할…!”
급기야는 구양휘의 입에서 거친 소리까지 튀어 나왔다. 실마리를 다 끄집어냈는데도 오리무중이다. 그렇다고 담천의를 탓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담천의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도 답답해 뱉은 소리였다.
담천의는 자신을 이야기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구양휘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한 것은 그런 것을 바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제는 금릉(金陵)에서 자랐소. 부친은 관(官)에 몸담고 있었고, 무장(武將)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오.”
그는 담담하게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구양휘에게 자신이 살아 온 세월을 이야기했다. 아홉 살에 일어난 가문의 참화와 부모님의 죽음. 금의의 중년인. 그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도전했다 패해서 자신의 삶을 버렸던 이야기. 그래서 만물표국에 몸담고 있었던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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