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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 한 수형인이 총살집행 바로 직전, 사진찍는 미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대전형무소 한 수형인이 총살집행 바로 직전, 사진찍는 미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 미 정부문서보관소

그중 3건이 비밀 해제되어 내 손에 도착한 날짜가 바로 5년 전 오늘 12월 23일이었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 처형(1950년 7월 초)', '서울에서 공산 게릴라 39명 처형(1950년 4월 20일)', '대구근교 부역자 처형(1951년 1월)'.

나는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와 제주4·3연구소에 이메일로 급히 알렸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문건에는 사진 18매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제민일보> 1999년 12월 24일자 특보로 나감.)

그 문건 목록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나의 심정은 '바로 이거다!' 50년 묵은 산삼을 초심자 심마니가 깊은 산중에서 발견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우편으로 배달된 누런 서류봉투를 개봉하고 그 문건을 들여다보았을 때 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솟구쳤다.

나는 아내와 함께 로스엔젤레스에 3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 미주한국일보 한우성 기자를 만났다. 내가 발굴한 문건들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의 눈도 둥그래졌다. 발굴 경위를 소상히 인터뷰하고 나서 1주일 가량만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했다.

한 주가 지나갈 무렵 전화가 왔다. 이 문건을 기초로 해서 기사가 완성되어 서울 본사로도 보냈으며 KBS에도 나간다고 했다. 최종적으로 나의 'O.K'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모든 자료들을 들고 서울에 나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밝히고 싶었다.

2000년 1월 6일 <한국일보>와 KBS를 통해서 전국에 알려졌다. 나는 1월 19일 서울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국방부에서도 나의 직접 연락을 받고 영관급 3인이 나와서 경청했다.

만 5년이 지나가는 오늘 날,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이 총살되어 암매장 된 곳은 그냥 그대로 남아 있다. 별다른 진척이 없다. 다만, 그 후 해마다 제주4·3 유족회 몇 분들이 가서 위령제를 현장에서 지내는 정도이다.

현장 훼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가속화되었다. 그 학살터 위에다 교회를 지었다는 서글픈 뉴스도 접했다. 건축과정에서 유골들이 튀어나왔는데도 몰래 방기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내가 직접 수차례 찾아가서 접한 현장은 너무나도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학살터 위에 채소를 가꿔서 먹는 '잔인'함인지 몰지각함도 목격했다. 뼈 조각들이 농기구에 걸려 튀어나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드는 '소문'은 '인골 가루나 기름이 불치병에 좋다'는 미신으로 도굴 유실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신으로 인한 유해유실은 전주형무소 '정치범' 학살터(황방산 기슭, 전주공동묘지 입구 왼편)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그 학살터 위에 '기독교 안식관'을 세운 것마저 대전 낭월동의 복사판이었다. 분노가 또 다시 솟구쳤다.

사람은 죽어서나 살아서나 '존엄성'은 매한가지가 아닐까? 하루속히 유골들이 수습되고 안장되는 그날을 바라본다. 관련 유족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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