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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일을 마치고 잰 발걸음으로 집에 되돌아가는 아저씨들의 일상의 모습에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낀다... .
ⓒ 김정은

6번 도로에서 새 삶 찾은 한국산 중고버스

태국 국경에서부터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을 거쳐 수도인 프놈펜까지 이어진 6번 도로. 앙코르와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캄보디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로인 이 길을 지금 나는 우습게도 한국산 중고버스와 함께 달리고 있다.

이 길에 대한 처음 느낌은 '쿵', '털썩', '터덜터덜' 세 가지 의성어로 모두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퍽 자극적이다.

버스 바로 정면에는 '아시아 버스와 함께 즐거운 여행을…'이라는 한글 문구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주로 마을버스나 관광버스로 이용되던 추억의 AM 시리즈….

1965년 설립되어 1976년 기아자동차에 인수되었다가 다시 1998년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에 입찰되면서 그 역사를 마감한 아시아자동차의 중고버스가 지금 물 설고 낯선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와트 관광용 버스로 제 2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산 자동차라는 너무나 선명한 표시 때문일까? 대책 없이 밀려드는 애잔함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내 머릿속에는 이런 저런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국에서 쓸모 없다고 퇴출된 물건이 이 물 설고 낯선 이국 땅에 와서 태국 국경과 씨엠립의 앙코르와트 황톳길을 오가며 자랑스러운 제2의 삶을 살고 있으니 이제 제발 과거의 서러웠던 기억을 잊고 새롭게 단장하고 마음껏 달릴 것이지, 왜 아직도 고국의 흔적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것이지?"

달릴 때마다 위 아래로 심하게 덜컹거리는 낯익은 한글문구 한 줄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고국 한국을 향한 진한 향수와 노구(?)의 고단한 삶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하긴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캄보디아 속 한국산 중고자동차의 현실은 내 느낌처럼 그렇게 애잔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 캄보디아에서 1990년대 한국에서 생산한 중고 소형트럭이나 버스는 인기 물품 중의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앙코르와트의 폭이 좁은 유적들을 통과하기에는 마을버스로 사용하던 한국산 중고 버스가 제격인 데다가 그 길고 긴 비포장 도로를 달려도 끄떡없을 정도로 잔고장 없고 튼튼하니 인기일 수밖에….

그렇다면 버스 내부에 일부러 한글 문구를 지우지 않은 이유는 한국산 자동차임을 알리려는 차주의 의도된 연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도 저도 아니면 자동차 내부까지 새롭게 페인트칠하기에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냥 방치했다고 보는 편이 더욱 객관적인 시각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행히 내 몸도 터덜거리는 황톳길에 어느새 적응되었는지 주변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여유도 생겼다.

금세 황토먼지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제멋대로 생긴 자연스러운 길…. 포장도로도 말이 포장도로이지 군데군데 깊게 파인 웅덩이 때문에 포장도로라 하기 미안할 정도로 덜컹거렸고 뽀얀 황토먼지를 날리며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 양 옆에는 평원이라고 하기 무색할 정도로 제 맘대로 자란 벼와 잡초들, 그리고 황토먼지가 뽀얗게 앉은 지붕과 나무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 캄보디아 6번 도로의 석양
ⓒ 김정은
그러나 그 제멋대로인 자연스러움이 가져다 준 꾸미지 않은 모습에서 쉴새없이 꿈틀거리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원초적인 생명력의 정 중앙에는 물론 이들이 있었다. 모기가 득실거릴 것 같은 수상한 물웅덩이 속에서도 살고 있는 아름다운 수련과 물고기, 그 물고기를 잡으러 애쓰는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잰 발걸음으로 집에 되돌아가는 아저씨들의 일상의 모습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이로운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서도 한결같이 뜨고 지고를 반복하며 제 소임에 충실하고 있는 태양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원초적인 생명력이다.

나무나 혹은 얇은 철판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허름한 38개의 다리를 건너 어느새 버스는 씨엠립에 도착했다.

메콩강이 잠시 머무는 곳, 톤레삽 호수

▲ 톤레삽 호수의 일몰
ⓒ 김정은
티벳 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 윈난성을 지나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을 이루며 흐르는 동남아시아의 젖줄 메콩강이 베트남을 지나기 전 잠시 머무는 곳인 이 곳 톤레삽 호수에도 슬슬 석양이 내려앉는다.

태국 국경에서부터 거의 4시간여를 달려와 바라본 호수의 모습은 건기 때라 수량이 그리 풍부해 보이지 않았지만 평상시에는 서울의 5배 정도 되며 우기철이 되면 경상도만한 면적으로 불어나는 거대한 호수답게 그 옆에는 신의 선물인 비옥한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또 물 반 고기 반이라는 호수 바닥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이 호수 주변에는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수상가옥촌이 형성되어 있다.

▲ 톤레삽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는 주민들의 모습, 이들에게 있어서는 배는 자가용과 같다.
ⓒ 김정은
배를 타고 돌아 본 톤레삽 호수 속 수상가옥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당장 먹고 사는 게 힘들 정도로 매우 허름하고 누추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으려다 보니 문득 앵글 속에 투영된 그네들의 삶이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동남아시아의 젖줄 메콩강이 베트남을 지나기 전 잠시 머무는 곳인 이 곳 톤레삽 호수는 우기 때 면적이 경상도 전체일만큼 규모가 크다.
ⓒ 김정은
바로 외국인들의 앵글에 비친 50년대 60년대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궁박한 모습이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판자촌, 거의 벌거벗은 모습의 아이들, 이 아이들이 관광객을 태운 배 가까이 다가와 달러를 달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서, 미군들에게 초콜릿을 달라 외쳤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어린 시절 모습을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그 당시 미군의 눈에 비친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도 이랬을까?

한때는 우리나라에 독특하고 전통적인 문화도 많은데 그런 추레한 모습만을 찾아서 찍어대며 과장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외국인들의 시선이 마땅치 않아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 역시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네들의 빈곤한 모습에 별 생각 없이 카메라에 들이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 역시 서구인들과 다를 바 없는 속물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문득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만났던,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소녀의 모습과 양철통을 타고 호수를 누비며 관광객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모델료를 달라는, 나름대로 영악한 소녀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지나갔다.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 윤동주의 '트루게네프의 언덕'


▲ 톤레삽 호수 수상가옥에 옹기종기 매달린 빨래들이 정겨워보인다.
ⓒ 김정은
톤레삽 호수에 어느덧 황혼이 밀려오고 있었고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눈깜짝할 사이 호수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운 호수 위를 가르며 육지로 되돌아가는 길, 배 안의 모터소리만 더욱 크게 들릴 뿐 주위는 고요했다. 간혹 호수 위 수상가옥 안에서 드문드문 새어나오는 희뿌연 불빛이 비칠 때면 어김없이 단란한 가족들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 그네들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들의 보물 TV에 모여 앉아 오손도손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는 중이다. 비록 전기료가 비싼 탓에 전기도 없이 배터리로 TV를 작동시키지만 지금 이 순간 그네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듯 보였다.

물 위에서 태어나 물 위에서 평생을 살다보니 육상에 올라오면 오히려 멀미기를 느낀다는 그들….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이 자신들에 내려준 만큼의 범위 안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삶을 살기에 자연은 그들에게 풍족한 물고기와 하수구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물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황토흙을 선물하였다.

▲ 톤레삽 호수 속 수상가옥의 모습, 문득 앵글 속에 투영된 그네들의 삶이 어딘지 모르게 과거 우리 부모님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김정은
톤레삽 호수의 민물고기들

▲ 톤레삽 호수에서 양식하고 있는 민물새우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는 860종의 어종이 살고 있는 천혜 보고이다. 그중 식용은 18종쯤이고 전 세계적인 희귀종 민물돌고래도 살고 있다. 다양한 희귀어족들이 생활하고 있는 곳인 만큼 톤레삽 호수의 개발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비근한 예로 캄보디아 정부가 부족한 전력사정을 해소하고자 메콩강 상류에 수력발전소를 만들 계획이었으나 민물 돌고래를 이유로 국제 환경단체에서 반대한 적도 있다.
/ 김정은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의 평화로운 삶이 언제나 이대로 유지될 것인가는 의문이다. 이미 일부 사람들의 물고기 남획으로 인해 톤레삽 호수의 물고기의 수가 줄어들고 있고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순수함을 잃어버린 채 더욱 영악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에게 밀어닥친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까?

1850년 프랑스인 신부 뷰오에게 밀림 너머의 거대한 앙코르와트의 모습을 처음 보여준 톤레삽 호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꾸로 외지인에게 유명해진 앙코르와트 덕분에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이 여파로 호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이 더 이상 변질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어둠이 깔린 호숫가 하늘 위에는 희미한 별빛이 제각각 빛나고 사람들을 호텔로 실어 나르기 위한 버스 안에는 불빛을 따라 모여든 성난 하루살이와 모기와 같은 벌레들이 먼저 와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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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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