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8년 경남 양산시 소재 민간임대아파트인 장백아파트에 입주한 김승원(38)씨. 그는 요즘 보증금 한푼도 건지지 못한 채 길거리로 내쫓길 위기에 직면했다. 얼마 뒤면 아파트단지 전체(26개동 3000세대)가 차례차례 단지째로 경매에 넘어갈 판이기 때문이다. 정말 '집도 절도 없는' 꼴이 되기 일보직전이다.
임대아파트 건설업자는 부도난지 오래.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국민은행(전 한국주택은행)은 건설업체에 빌려준 돈을 되찾아야 한다면서 담보로 잡아놓은 임대아파트를 경매에 넘기겠다고 임차인들에게 통보했다. 그게 지난해 5월쯤의 일이다.
국민은행의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올 3월에야 접한 김씨는 화급한 심정으로 등기부등본을 떼어봤다. 그랬더니 1∼4순위까지 이미 근저당이 설정돼 있는 것 아닌가. "아차" 싶었던 김씨는 그제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 자칫하면 걸어놓은 보증금을 전액 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집에서 내쫓기나 구치서에서 콩밥 먹으나 마찬가지" 입주민들 자포자기
임대아파트라 설정이니 확정일자니 하는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김씨는 자신을 탓하며 경매를 저지하기 위한 '생존권 투쟁'에 뛰어들었다. 보증금도 못 찾고 집에서 쫓겨나나 구치소에서 '콩밥'을 먹으나 매 한가지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에서다.
김씨처럼 생존의 문턱에서 보증금도 되찾지 못한 채 내쫓길 처지에 있는 저소득층 서민만 이 아파트에 수천명이다. 전국적으로 2004년 11월 현재 부도임대주택 누계분은 12만5253세대(건교부 자료)에 이를 정도로 김씨와 같은 피해자들은 광범위하다.
특히 보증금이 소액임차인 범위(22평 2300만원, 26평 2700만원)를 넘어선 탓에 주택임대차보호법의 보호도 받지도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주택임대차보호법(2001년 9월 15일 이전)은 보증금이 2000만원 이하인 세대에 대해서만 우선 변제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언론들은 근저당권 설정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임차인만을 탓하거나 건설경기의 위축만을 따질 뿐 문제의 핵심은 비켜가기만 하고 있다. 보증금마저 떼일 수밖에 없는 속사정은 조명하지 않은 채 '겉 핥는' 보도만 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 임차인들의 불만이다.
대책위, "불법근저당으로 입주민 보증금 전부 날릴 판" 주장
| | | 공금횡령하고 뇌물주고 | | | 부실업주에 대한 부실대출도 원인 | | | | 장백아파트는 건축 당시부터 이미 부실을 예고하고 있었다.
98년 8월 장백아파트 사용검사 승인과정에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장백건설 대표 김성호씨가 당시 안종길 양산시장에게 1억8000여만원을 건네 김 대표(2000년 12월)와 안 시장(2002년 7월) 모두 구속됐다. 김씨가 구속되기에 앞서 장백건설은 부도처리됐고, 울주군 삼남면에 짓고 있는 장백임대아파트도 공정 70%에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씨는 지난 94년부터 국민주택기금 지원을 받아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1천540가구)와 경남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등 3곳에 모두 5776가구의 임대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지난 96년부터 3년 동안 회사 공금 80억7000만원을 빼내 개인용도로 사용한 전력도 가지고 있다.
이같이 부실한 건설업체에 당시 한국주택은행은 수백억원에 달하는 임대주택건설 및 중도금지원자금을 대출해 준 셈이다. 한마디로 부실업주에 대한 부실한 대출이 오늘과 같은 부도임대아파트 사태를 불러온 한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 | | | |
현재 부도임대아파트 대책위원회쪽은 국민은행이 부도아파트 건물에 불법근저당권을 잡아놓은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많은 수의 부도임대아파트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매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도임대아파트 건물에 설정할 수 없는 근저당을 국민은행이 잡아놓은 탓에 임차인들이 경매 뒤 배당금을 받을 수 있는 여력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이들 대책위쪽의 주장이다.
장백아파트 건물 등기부등본을 보면, 1순위 근저당은 한국주택은행(현 국민은행) 156억원, 2순위 근저당은 한국주택은행이 579억2800만원, 3순위 근저당은 박아무개씨가 600억원, 4순위 근저당은 한국주택은행이 156억원으로 설정돼 있다. 1∼3순위 근저당은 장백아파트가 준공된 당일(98년 9월 18일)에, 4순위 근저당은 장백건설이 부도난 9월 19일에 설정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이 가운데 1순위 근저당(156억원)과 2순위 근저당(579억2800만원) 합계 735억2800만원은 장백건설이 임대아파트 건설을 위해 국민주택기금에서 빌려쓴 임대주택건설자금 융자금 565억6000만원에 대한 담보금액(채권최고액)이다. 통상 채권최고액은 대출 원금의 130%까지 잡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주택은행이 735억2800만원까지 설정해 놓은 것이다.
문제는 박용갑씨가 3순위로 설정한 근저당과 한국주택은행이 4순위로 설정한 근저당의 정체. 특히 한국주택은행이 4순위로 설정해 놓은 156억원은 위법성이 농후한 공공임대중도금대출금에 대한 담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공공임대 중도금 근저당 설정은 규정위반 불구, 국민은행 보증서 특약 이유로 설정
현행법은 건설업체가 국민주택기금으로부터 빌린 공공임대중도금은 건설자금융자금과 별도의 담보를 설정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즉 국민주택기금을 빌려주는 한국주택은행(현 국민은행)은 임대아파트 건물 외 다른 담보를 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은 관련 원칙을 명시하고 있는 국민주택기금운용규정 27조(담보의 취득 등) 6조 1항이다.
⑥한국주택은행장이 민간사업자 등에 대하여 국민주택건설자금이외의 자금을 융자하는 경우에는 다음 각호와 같이 담보취득 하여야 한다.
1. 연구개발자금, 기자재구입자금, 조립식주택설비자금, 임대주택중도금지원자금, 표준화자재생산설비자금, 재건축사업자금 : 당해 사업용지 또는 다른 물건을 담보취득
당시 한국주택은행이 이러한 운용규칙을 무시하고 4순위 근저당 설정이 가능하도록 한 증거는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현 한국주택금융공사가 올 10월 공개한 장백건설에 대한 관리기업정보표를 보면, 장백건설은 97년 11월 25일 당시 한국주택은행으로부터 120억원을 임대중도금조로 국민주택기금에서 대출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특히 한국주택은행과 장백건설이 당일 체결한 대출거래약정서 제4조 추가담보 제2항은 '제1항의 시설물과 건물이 준공된 때에는 즉시 그 시설물과 건물을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기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건물에 대한 담보취득이 가능하도록 못박고 있다. 계약서 자체가 국민주택기금 관리규정 위반을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부도대책위쪽은 이러한 위법행위가 97년 당시 국민주택기금과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을 동시 운영·관리해 오던 한국주택은행이 가짜 보증서를 발급해 담보를 취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윤세범 부도대책위원장은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당시 한국주택은행은 공공임대중도금 대출에 대해서도 임대주택 근저당 설정이 가능하도록 보증서에 특약사항으로 담아 건설업체에 가짜 보증서를 발급해 줬다"면서 "이를 받아서 임대아파트가 담보인양 하고 전부 책임은 임차인에게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현 국민은행에 의해 4순위 근저당권만이라도 설정돼 있지 않았다면 그나마 경매를 통해 일정 부분 배당을 받아 보증금이라도 건질 수 있지만, 이마저도 지금은 힘들어진 형국이다. 만약 국민은행의 4순위 근저당권이 불법으로 판정돼 풀리기만 한다면 이들 입주민들은 보증금의 상당부분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아무개씨의 3순위 근저당권도 불법으로 판정돼 건물에만 700여억원이 입주민들의 배당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고 장백아파트 부도대책위쪽은 전했다.
국민은행 "취급행위 자체는 문제없다"...금융공사 "주 채권은행에 확인할 사항"
하지만 주 채권은행인 국민은행과 당시 신용보증업무를 담당했던 현 주택금융공사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국민은행 국민주택기금관리팀은 임대중도금 취급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주택금융공사 사업자보증팀은 주 채권은행에서 확인해야 할 사항이라며 한발 빼고 있다.
국민은행 국민주택기금팀의 한 관계자는 28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근저당을 설정할 수 있도록 보증서 약관에 명시돼 있었던 것 아니냐"며 "우리는 신용보증서를 담보로 했기 때문에 취급 자체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문제가 된 97년 당시에도 보증업무를 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고 그 부서에서 별도의 기준에 의해 보증서를 작성한 것 아니겠느냐"며 "보증약관은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얘기할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떠넘기기는 한국주택금융공사쪽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주택금융공사의 한 관계자는 "현재 서류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이와 같은 사항은 근저당권의 주체인 주 채권은행에서 확인해야 한다"며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다만 건설업체의 공공임대중도금 대출에 대한 회수는 원칙적으로 임차인(임대주택 입주자)의 입주잔금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힘으로써, 근저당 설정이 원칙을 벗어난 사항임을 인정했다.
건교부 "2002년 법 개정 뒤로는 괜찮다" 개정전 피해자 대책은 언급 없어
정책당국인 건설교통부는 이미 제도개선이 됐다는 답변만 내놓고 있다. 권도엽 건교부 주택국장은 지난 24일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준공 뒤 부도임대주택의 입주자 피해는 제3채권 등이 설정된 경우 소액임차보증금만 우선변제 받을 수 있고 보증금의 전액회수가 불가능해 발생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건교부는 "제한물권은 임대아파트의 분양전환이 이뤄지는 시점까지 설정을 제한토록 제도개선해 부도가 발생해도 임차인의 피해는 거의 없게 됐다"며 제도개선 사항을 설명했다. 그러나 제도개선 이전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한편, 부도임대아파트 대책위와 함께 현 국민은행의 4순위 근저당권에 대한 법률적 검토작업을 벌여 온 민주노동당은 이번 사태를 임대사업자에 대한 관리부실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있다. 이선근 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은 "이번 문제는 담보가 지나친 부분도 있고, 부당하게 대출해 간 측면도 있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이 본부장은 "민간임대사업자들은 국민주택기금의 상환만기일이 되면 고의부도를 낼 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에 로비해 부당대출을 일삼아, 13만세대의 세입자들이 갈 곳을 잃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러한 진단을 통해 민주노동당은 부도임대아파트의 실상을 면밀히 조사해 임대사업자와 금융기관의 부당대출 행위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