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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무림맹주가 을유년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한가지씩을 말하라고 했을 때, 무림맹의 재정을 맡고 있던 윤가 놈이 침체에 빠져있는 무림맹의 경제를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면서 살려놓겠다고 허튼 소리를 빽빽해댈 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하여, 황가 놈이 율령은 만드는 것보다 지켜져야 율령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율령을 집행하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이르러 더 이상 참지 못해 객기를 부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죽과 연초주머니, 천축산 엽연까지 허공에 날린 후 가문의 절정도법인 오호단문도법으로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내일, 바로 을유년 원단(元旦)부터 연초를 끊겠다. 노부가 연초를 피우게 되면 수석장로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수신(修身)을 못하는 자가 어찌 제가(齊家)를 할 것이며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말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겠다고 뒤끝이나 남겨 둘 것을….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음흉스런 웃음을 흘리던 집법전주 황가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차기 무림맹주좌를 놓고 앙숙관계에 있던 그 놈이 연초를 입에 대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던 호언장담에 이미 차기 무림맹주 자리가 눈에 아른거리던지 재수 없이 낄낄대던 꼴이라니…. 아, 내가 그렇게 말하게 된 것은 그 놈의 음모가 아니었을까?

피울 수 없다는 금제가 더욱 더 목 깊숙한 곳부터 당기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사나이 중 사나이 아닌가? 어차피 뱉은 말 주어 담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문을 열어 젖혔다. 을유년 춘절 아침의 싸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돌았다.

‘어차피 잘 끊은 거야. 집무실에서 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어. 건강에도 좋다잖아.’

그는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을유년 새해 첫날에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생각이 엉키고 있었다. 목과 입에서부터 시작한 연초에 대한 강렬한 유혹은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허전한 손이며, 시선은 자꾸 연초가 있을만한 곳을 뒤지고 있었지만 추호도 빈틈없는 초초는 이미 자신의 침실에서 단 한 점의 연초가루마저 남기지 않은 뒤였다.

‘우찌, 그리 야속하게….’

식전연초(食前煙草) 불로장생(不老長生)이오, 식후연초(食後煙草) 영생불사(永生不死)라는 말을 가법보다 우선하여 맹신(盲信)한 그는 조반을 먹어도 시큰둥하고, 뒷간에 가서도 뒤끝이 깨끗하지 못했다. 더구나 오시(午時)가 가까워지자 언제나 강렬한 신광을 뿜던 그의 눈은 쥐약 먹은 닭처럼 맹하게 변해버렸다. 신년하례를 받는둥 마는둥 그는 타들어가는 목을 달래기 위해서 애꿎은 오룡차만 마셔대며 안절부절 못했다. 더구나 자신을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가 한결같았다.

“수석장로님께서 연초를 끊으셨다니 경축하옵니다.”

아, 여우같은 아내마저도 눈물을 글썽이며 끊는데 도움이 된다는 당호로며, 제약원(製藥院)에서 특별히 만들었다는 박하향이 알싸한 쌀알만 한 단약을 한 됫박이나 가져 온 것이다. 도대체 어린애들이 물고 다니는 당호로를 사나이 중의 사나이인 자신이 어찌 채신머리없이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안되겠다. 이럴 때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

오시가 지나면서 그는 약 먹은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발길을 무림맹의 연무장(鍊武場)으로 향했다.

“자, 권각법은 일단 기초가 중요하다. 중심을 태산같이 안정적으로 만들고….”

수하들을 이리 가르쳐 본 게 얼마만인가? 그는 각종 권각법부터 장법, 지법들에 관한 요결을 세세히 일러주었고, 수하들의 눈에 존경과 흠모의 기색이 역력하게 떠오른 것을 본 그는 내심 흡족했다. 진즉에 이리 할 것을….

“일각 동안 휴식, 휴식 후에 각자 사용하는 병장기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직접 시범을 보인 탓에 싸늘한 날임에도 등짝이 후끈 달아오르고 전신에서 주독이 빠지는 것 같았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휴식하라고 했더니 이 녀석들 한쪽 귀퉁이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연초를 피워대는 게 아닌가? 연무장은 야외이니 연초를 못 피울 것도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었다. 후각을 자극하는 저 연초 향에 피고 있는 것이라도 당장 빼앗아 한 모금 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자신이 수석장로의 자리에 오르자 가문의 영광이요, 차기 무림맹주는 따 놓은 당상이라며 기뻐하던 집안어른들을 볼 낯이 없음은 물론이오, 자신의 여생도 죽은 것과 다름 아닐 것이었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지. 암, 한갓 연초로 인하여 낙향할 수는 없지.’

얼굴들은 보이지 않고 입에 물려있는 연초만 눈에 띄었다. 그러다 문득 과거 군역(軍役)을 받을 시절 동료들과 돌려 피우던 연초가 생각났다. 고된 각개창술훈련 뒤에 피우던 싸구려 연초는 얼마나 맛있었던가? 독연실에 들어가 눈물을 질질 흘리고 나와 피던 연초 맛은 또 어땠던가?

대개 이런저런 핑계로 군역을 빠지거나 사람을 사서 대신 군역을 받게 했던 다른 무림세가의 자식들과는 달리 떳떳하게 군역까지 직접 받았던 자신이었다. 현무림맹주와 무림맹주좌를 놓고 다투던 회륜판관(回輪判官)이 무림맹주에 오르리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들들의 군역문제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고 했던가? 대쪽 같은 성격으로 원칙에 충실했던 그 분의 발목을 잡은 군역문제는 요사이 가무단이나 경극단의 별(星)들에게도 난리 나게 했다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문득 연초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들이 자신의 앞에서 연초를 피워대는 것도 어쩌면 집법전주 황가 놈이 시킨 음모일지도 몰랐다.

“휴식 끝, 이후에는 병장기 교습이 아닌 권장법 대련에 들어가겠다. 누가 뭐래도 실전만큼 좋은 수련은 없다.”

그들은 신년부터 재수 없는 수하들이었다. 무림맹의 연무장은 그 시각 이후 저녁까지 애꿎은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운동도 역시 실전이 최고였다.

입맛도 없었다. 괜히 초조했고, 뒤보고 밑 닦지 않은 것 마냥 개운하지도 않았다. 저녁도 건너뛰고 자신의 집무실로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초초야 그렇다지만 단 하루 사이에 집무실을 지키는 수하들이 치워놓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없었다. 이곳저곳을 미친 듯 뒤져도 연초부스러기 하나 없었다.

“신니엔콰이러(新年快樂). 새해 첫날 쉬시지도 않고 어인 일로 나오셨습니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법전주 황가의 직속수하인 율령당주(律令堂主) 손가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연초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있었다면 앞뒤 재지 않고 피웠을 것이고 손가에게 들켰을 게 뻔했다. 그 뒤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했다.

“험험, 새롭게 서류들을 정리하고 내일부터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얼른 핑계된 것 치고는 훌륭한 대답이었다. 손가는 남의 뒷조사에 있어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자로 벌써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의 세모꼴 눈은 벌써 이 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개코 보다 민감하다는 코로 단 한 점의 연초 향까지 파악했을 것이다.

‘네놈들의 음모를 모를 것 같으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헤집어 놓은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손가 놈은 더 있기 미안했던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음흉스런 미소를 지었다.

“바쁘신 것 같아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손가 놈이 나가자마자 그는 힘없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허탈했다.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수하 이놈들이 언제부터 이리도 부지런해 이곳에 있는 연초까지 말끔하게 치워놓았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문득 손가 놈이 잠시 앉았다가 일어선 자리에 떨어져 있는 천축산 엽연 한대가 눈에 들어왔다.

‘엽연, 저게 어떻게 저기에?’

그는 마치 사막에서 천지(泉地: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앞뒤 재지 않고 손을 뻗어 엽연을 집어 들었다. 도둑질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빨라졌다. 엽연으로 코밑을 쓰윽 문지르자 익숙한 말리화(茉莉花) 향기가 은은히 폐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로 이거였다. 아! 이 향기! 여기에 불을 붙이면.

‘화섭자가 없어도 본가의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을 삼성 정도 운기하여 검지 끝으로 몰면 불꽃을 피워 올릴 테니 불을 붙일 수는 있을 것이고, 연기는? 혼원벽력장이나 건곤신장을 사용해 창밖으로 빼 버리면 어떨까?’

그는 팽가 비전의 혼원벽력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청각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 먼저 살피기 위해서였다.

‘음,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이 오장 밖이군. 헌데 연기는 그렇다 치고 연초향은?’

냄새가 문제였다. 혼원흡기공으로 연초향을 빨아들여 내뿜지 않고 아예 몸속으로 퍼지게 하면 어떨까? 나중에 배출해내면 될 것 아닌가? 아니야, 의원 나부랭이들이 연초향이 오보단장향보다 더 독하다 했으니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질지 몰라. 그러면 안 되지. 끙, 냄새, 냄새, 이것을 어찌 없앤다?

아! 그래. 제(祭)를 올릴 때 쓰는 만향(卍香)을 피면 냄새마저 없앨 수 있다! 맞아. 일단 엽연에 불을 붙이고….

그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손가 놈이 급히 들이닥쳤다. 손가 놈을 본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역시 음모였다. 저놈이 고의로 놓고 간 것이다.

“이게 무슨 냄새입니까? 킁킁, 엽연이 타는 냄샌데?”
“자, 자네는 왜 돌아온 건가?”
“아, 재정원주 윤 어른께 드릴 엽연을 잃어버려 혹시 이곳에 빠뜨리지 않나 하고 왔는데, 끊으셨다던 연초를 다시 피우신 겁니까?”

손가 놈은 이미 범행현장을 잡은 포두같이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나 손가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엽연을 번갈아보던 그는 당황스런 표정 대신 일순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엽연 전체가 재로 화해 기다란 모습 그대로를 보이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폭갈이 터져 나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감히 본 장로를 능멸하려 드는 게냐? 네놈 머리통도 혼원벽력신공으로 재로 만들어주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는 비연투림으로 꽁지 빠지게 도망가 버렸고, 그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가 혼원벽력신공으로 엽연에 불을 붙이려는 바로 그 순간 손가가 들이닥쳤고, 당황한 나머지 신공을 제어할 틈도 없이 극성까지 끌어 올리는 바람에 손에 있던 엽연이 고스란히 재로 화했던 것이다. 그런 덕에 그의 연초를 끊겠다는 결심이 단호해서 그 놈이 의도적으로 흘린 엽연을 일순간에 태워버렸다고 손가 놈은 생각했을 터였다.

다행이었다. 정말 천지신명이 돌보고, 조상의 음덕이 깊은 탓이었다. 그는 아찔했던 순간을 생각하자 손가 놈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기 자신이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그까짓 연초, 피던 끊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끊어보니 그까짓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어찌어찌 지나갔지만 내일은 어떻게 참을까?’

솜에 물 먹인 듯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그의 귀로 어디선가 방정맞은 횃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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