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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쪽 영산강 상류에서 바라 본 영산포.
나주쪽 영산강 상류에서 바라 본 영산포. ⓒ 오창석
독일의 라인강에는 로렐라이 언덕이 있고 나주의 영산강에는 ‘아망바위’가 있다. 앙암바위, 상사바우라고도 불리는 이 절벽은 로렐라이 언덕처럼 오래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영산강변에 있는 아망바위.
영산강변에 있는 아망바위. ⓒ 오창석
이야기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망바위 근처 마을에서 홀아비를 모시고 살던 처녀 아비사는 병중의 아버지가 먹고 싶다는 물고기를 구하지 못해 혼자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어부 아랑사는 잉어를 잡아 아비사에게 주었고 이를 계기로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마을의 총각과 사귀는 것을 질투한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만나던 아망바위에서 아랑사를 떨어뜨려 죽였다.

그 뒤 아비사가 날마다 바위에 올라 슬피 울자, 죽은 아랑사가 구렁이로 환생하여 둘은 저녁마다 그곳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자 마을 총각들은 한 몸이 되어 엉겨있는 아비사와 아랑사를 한꺼번에 바위에서 밀어뜨려 죽여 버렸다.

그 후로 마을 총각들은 저주를 받아 하나 둘씩 시름시름 앓다 죽게 되었고 마을에서 해마다 씻김굿을 해주며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서야 화를 면하게 되었다.

영산포로 들어 가는 영산대교에서 바라 본 영산강.
영산포로 들어 가는 영산대교에서 바라 본 영산강. ⓒ 오창석
로렐라이 언덕 앞을 흐르던 물길처럼 이곳 역시 물살이 매우 급하여 영산강을 항해하던 배들이 애를 먹었던 곳이었다. 조선의 학자 금남 ‘최부’는 이곳의 빠른 물살에 휩쓸려 급기야 중국땅까지 표류, 표해록(漂海錄)을 남기기도 했으니 곡절 많은 전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영산창’이 있던 곳.
‘영산창’이 있던 곳. ⓒ 오창석
호남의 내륙을 관통하는 영산강은 예로부터 이 지역 수운(水運)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조창(漕倉) 가운데 하나인 영산창(榮山倉)이 영산포에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물길이 험한 곳에서 조운선이 자주 뒤집히자 중종 7년에는 영광 법성창으로 조창을 옮겨 버렸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문서보관고로 쓰였던 건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문서보관고로 쓰였던 건물. ⓒ 오창석
조선시대의 영산포는 독립된 시장을 이루지는 못한 채 나주의 상권에 흡수되어 있었고, 나주의 길목에 위치한 한 포구에 불과했다. 그러다 목포 개항 이후 일인들의 진출에 의해 번성의 길을 걸었는데, 근대 영산포의 역사는 일제의 조선수탈과 함께 시작되어 일본인들의 상업적 필요에 의해 육성된 곳인 셈이다. 1898년에 일본인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산강을 따라 형성된 포구의 수는 약 40여개였으며 이 가운데 영산포가 중심이었다.

나주역과 통합, 2001년에 폐역이 된 영산포 역.
나주역과 통합, 2001년에 폐역이 된 영산포 역. ⓒ 오창석
목포 개항 전까지 부산에서 온 일본인 미곡상들은 이곳을 드나들며 호남지방의 미곡을 반출해 갔으며 개항 후에는 목포를 거점으로 한 일인들이 영산포를 장악했다. 이처럼 영산포는 도로와 철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유일한 교통로 역할을 하며 호남 곡창을 수탈하는 창구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18년, 전 국토의 62.1%가 일본인들의 소유였는데 영산포 일대의 토지는 1915년에 78.4%를 일인이 점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이곳은 일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일제시대 당시 나주 제일의 거부였던 ‘구로즈미’라는 사람의 집.
일제시대 당시 나주 제일의 거부였던 ‘구로즈미’라는 사람의 집. ⓒ 오창석
당시 영산포 일대의 최대 농토 소유자였던 ‘구로즈미’는 모든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들여와 집을 지었는데, 지금도 온전히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대저택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문서고와 함께 수탈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대표적 상징물이다.

1915년에 세워진 영산포 등대.
1915년에 세워진 영산포 등대. ⓒ 이철영
수원(水源)을 이루던 강줄기에는 광주댐, 나주댐, 담양댐, 장성댐을 쌓아 수량이 형편 없이 줄어 버렸고 1981년에는 하구언에 방조제까지 만들어 수운(水運)으로서의 영산강은 생명을 잃어 버렸다.

구한말로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영욕의 역사를 거쳐 온 영산포도 이제 포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외롭게 서 있는 하얀 등대만이 이곳이 과거 배들이 오간 물길이었음을 상기시켜 줄뿐이다.

과거 정미소와 비단집이 즐비했던 영산포 거리.
과거 정미소와 비단집이 즐비했던 영산포 거리. ⓒ 오창석
떡방앗간을 하고 있는 김양님(66세)씨는, “진즉 여그를 떴어야 하는디 그냥 살다본께 47년이 흘러가 부렀네. 스무살에 시집왔을 때만 해도 여그가 모두 정미소에다가 술도가, 비단집이 쭉 늘어서 있었은께, 살만 했제. 누가 요로코 쪼그라져 버릴 중 알았단가. 여름에 물난리 나서 집이 몽땅 잠겨 불고 난께 아들, 며느리도 못살겄다고 재금 나가 부렀어” 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 쉰다.

영산포(나주시 영산동)의 '홍어 거리'
영산포(나주시 영산동)의 '홍어 거리' ⓒ 오창석
70년대까지만 해도 활기에 넘쳤던 옛 명성을 되살려 보기 위해 지금 영산포는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주시청 앞 완사천에서 왕건과 장화황후 오씨의 로맨스를 담은 샘물을 마시고,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서 이 곳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톡 쏘는 홍어의 진미를 맛보며 막걸리 잔에 아망바위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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