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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장 통천신복(通天神卜)
장안에서 가장 좋은 객점을 꼽는다면 장안루(長安樓)다. 이백여년의 전통과 더불어 그 규모나 음식 맛으로 장안에 온 사람은 꼭 한 번 들러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이층으로 지어진 장안루는 장안을 가로지르는 위하(渭河)를 끼고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장안 명물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이용하기에는 음식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한끼 식사로 한달 생활비를 탕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안루는 항상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인간에게는 허영이라는 기이한 습성과 남에게 과시하려는 괴벽이 있기 때문이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시간에 장안루에서 일곱명이나 되는 인원이 앉을 수 있는 탁자를 차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기다려 준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정말 대단한 곳이군. 백오십석이나 되는 자리가 꽉 차다니 장안의 명물은 맞는 모양이야.”
팽악이 장안루에 들어서자마자 혀를 차며 한 말이었다. 밖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의 상식으로는 객점이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 손님이 자리 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이층에도 백여좌석은 될 거에요.”
장안루의 이층은 일층과는 달리 방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이층은 무림인들은 출입하지 못하는 것이 이곳 장안루의 관례다. 주로 지방의 유지나 학유, 관료, 상인과 부호들이 이용하는 터라 아예 무림인들과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어....모용형.....! 여긴 웬일이오?”
“모용(慕容)오라버니...!”
창가 자리에 십여개의 좌석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있던 이십대 중반의 청년을 보고 팽악과 남궁산산이 반가운 듯 동시에 불렀다. 청의 단삼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물이었으나 전신에서 풍기는 느낌은 차가왔다. 사내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눈인사를 하더니 구양휘와 광도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했다.
“그 간 두 분 형님은 별래무양 하셨소?”
“예정보다 이틀 정도 늦었구나. 쉽지 않았던 모양이지?”
구양휘가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구양휘의 말투로 보아 이미 그들은 만나기로 약조되었던 모양이었다. 모용수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구양휘가 재차 말을 이었다.
“자... 서로 인사들이나 하지.”
담천의와 갈인규를 번갈아보며 구양휘가 한 말이었다.
“집안에 검중지왕(劍中之王)이라는 황제검(皇帝劍)은 팽개치고 손바닥 만한 도(刀) 몇자루 날리는 기술로 별 볼 일없는 놈들을 혼내주었다고 무정비도(無情飛刀)라는 거창한 호까지 받은 인간이야.”
언제나 저런 식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소개에 이미 이력이 난 듯 개의치 않고 모용수는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모용가(慕容家)의 모용수(慕容秀)요. 잘 부탁드리오.”
정중한 그의 태도에 담천의 일행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담천의요. 만나서 반갑소.”
“갈인규이외다. 잘 부탁드리겠소.”
무정비도(無情飛刀) 모용수(慕容秀)
그는 모용가의 적손(嫡孫)이다. 비록 지금은 일개 무림세가로 전락해 있다하나 모용가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화북(華北) 지역을 지배했던 연황실(燕皇室)의 황족(皇族)이다.
중원에서 보면 이민족이라 할 수 있지만 대개가 그렇듯 모용가도 이미 한족과 다름이 없게 동화되어 버린 터, 제사(祭祀)나 혼례 등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무림세가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현 무림에서 모용가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 현 가주인 모용화궁(慕容和宮)은 이십여 년전 가문의 명검인 황제검으로 중원을 휩쓴 바 있는 절대 고수였다.
더구나 모용수는 말투나 행동에 절제가 있고 품위가 있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구양휘와는 영 다르다. 전형적인 무림세가의 후손임을 보이고 있다. 인사를 나눈 모용수의 얼굴에 잠시 의혹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갈소제는 갈대인과 함께 먼발치에서나마 본적이 있는 것 같고... 혜청대사께서는 그간 잘 지내셨소?”
“오랜만이오. 모용시주.”
모용수와 혜청은 구면인 것 같았다. 갈인규와도 정식 인사는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얼굴은 아는 것 같았다.
“왠일로 대사께서는 이리 발걸음을 하셨소? 선사께서 아예 금족령을 내리신 것으로 아는데...”
“모용시주는 소승이 절간에 파묻혀 있어야 당연하다는 말씀이구려. 소승에게 빚진 술 한잔을 갚지 않으시려는 거요?”
혜청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니 아마 모용수에게도 술을 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혜청이 모용수를 보고 반가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씀을.... 그때 술 세동이를 사기로 약조 드리지 않았소? 갑자기 구양형과 동행을 하고 계시니 뜻밖이라.....”
그 말에 혜청이 탄식처럼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인정머리 없는 사부께서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타인의 종노릇이나 하라고 보낸 것이라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괴벽에 괴행을 일삼는 혜청의 말이니 곧이 곧대로 들을 바 없지만 모용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세상에 광무선사의 고제자를 종으로 삼을 사람이 있을까?”
그가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치부하려 하자 혜청은 슬쩍 눈짓으로 담천의를 가리켰다. 모용수의 눈에 기이한 기색이 어렸다. 구양휘와 팽악의 기색을 보자 그의 말이 맞는 듯 하다.
“괴사(怪事)는 괴사구려. 하기야 눈을 가진 곳이라면 어디든 담천의란 인물을 주시하느라 요사이 정신없다더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광도가 불쑥 끼어들자 모용수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광도형은 같이 다니면서 그런 소식도 못 들었소? 하기야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 소제도 들은 소리오만 초혼령을 가지고 있고, 풍운삼절을 은퇴시켰는가 하면 무당의 비전지기에 소림 광무선사의 심득을 얻은 인물.... 구양형이 감싸고 돌며 같이 어울려 다니는 사람...”
모용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로 정확했다. 담천의가 모습을 보인 이후로 있었던 일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무림이란 이런 곳이다. 눈을 가진 곳....어떤 문파든지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눈이 얼마나 정확하고 방대하냐에 따라 생존하고 세력을 키우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하여튼 그렇소.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요.”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로 모아지는 눈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들이 이곳 장안루에 오는 동안에도 보이지 않는 눈길을 의식해야만 했다. 그래서 구양휘가 이름없는 객점에 틀어 박혀 있었는지 모른다.
“소제도 사실 매우 궁금했소. 갑작스레 나타나 전 무림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인물이 어찌 생겼나 해서 말이오. 헌데 담형...”
“잘 생겼잖아.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자리에나 앉자. 언제부터 모용수가 이리 말이 많았어?”
모용수가 담천의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무언가 물으려 하자 구양휘가 중간에 말을 짤랐다. 더구나 마침 두 명의 점소이가 양손 가득 들고 음식을 날라 왔기 때문에 모용수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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