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낭만파 작가 빅토르 위고. 한국에는 ‘노트르담의 꼽추’로 알려진 위고의 걸작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de Paris; 1831)을 보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노트르담 성당의 부주교 프로로에게 쫓기는 대목이 나온다. 박진감 있게 묘사된 그 장면에서 소설의 주인공이자 성당의 종지기인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성당 안으로 이끎으로써 그녀를 구한다.
서구에서는 중세 때부터 성당이나 교회가 삼한시대의 소도(蘇塗)나 그리스·로마의 어사일럼(asylum, 피난처)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인 소도는 나라 법의 힘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신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령 죄인이라 해도 일단 그곳으로 도망하면 제 발로 걸어 나오지 않는 한 그를 돌려보내거나 잡아갈 수 없었던 지역이다.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가 도망했던 노트르담 성당 역시 그들에게는 둘도 없는 안식처, 곧 소도가 아니었을까.
영어 단어에서 성당이나 교회를 의미하는 ‘sanctuary’는 특히 중세 시대에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교회 등 사회적 약자의 ‘피신처’나 ‘은신처’를 가리키는 뜻도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1697년 영국이 의회령으로 그런 기능을 박탈한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18세기 말에 이르러 대부분 유명무실화됐지만, 한국만은 예외였다. 서울 명동에 가면 지금도 여전히 한국판 소도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
소도는 왠지 사람들의 일상과 떨어진 곳에 위치할 법하지만, 한국판 소도는 번화가의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유쾌한 소식보다는 쓸쓸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오는 우울한 연말연초. 며칠 전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더 쌀쌀해진 명동을 찾았다.
쇼핑몰 아바타에서 명동길을 따라 삼일로 쪽으로 걸어보자. 완만한 오르막을 하나 넘는가 싶더니 갑자기 정면에 군사독재 시절에 세워졌을 법한 흰색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옛 성모병원이 있던 건물이다. 지금은 가톨릭회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오른쪽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바로 한국 가톨릭의 총본산이자 ‘한국판 소도’ 명동성당이다.
명동성당, 기어이 종현 마루에 들어서다
명동성당이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에 들어선 것은 1백여 년 전의 일이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가 이곳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던 종을 가져다가 단 이후 ‘종현(鍾峴)’이라 불렸던 이곳에는, 애초 조선 철종 대에 이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윤정현(尹定鉉)의 저택이 있었다. 프랑스 국적의 초대 주임신부인 쁘랑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인들은 1883년 바깥채만 60여 칸에 이르렀다는 이 집을 사들였고, 1887년 5월 3일 조불수호조약이 비준됨으로써 프랑스인도 서울이나 기타 개항지에 대한 토지구입권과 건물신축권을 인정받아 성당 건립을 위한 본격적인 성당 터 정지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당이 순탄하게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쁘랑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정지작업을 하고 있던 1888년 1월, 조선 정부는 이 부지에 대한 소유권을 억류해버렸다. 이유인즉슨 성당이 들어설 터가 역대 왕들의 영정을 안치한 영희전(永禧殿)의 주산맥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지 않았을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명동성당이 들어선 고개 위에 올라서면 장안은 물론 왕궁까지도 빤히 내려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통을 중시하고 절대 왕정을 지켜왔던 조선에서, 이를 쉽게 용인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정부는 정지작업을 중단할 것과 동시에 토지 매입금을 지금의 서울시청격인 한성부를 통해 갚아주겠으니 토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을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조선 정부와의 사이는 꺼림칙했지만 ‘프랑스’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던 선교사들, 그들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외국에서 온 천주교인들은 ‘이미 그 위치에는 민가가 있었고, 성당 터와 영희전과의 사이에 골짜기가 있으므로 풍수 지리적으로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또 러시아 공사를 통해 ‘합법적으로 매입한 토지이니 소유권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는 합법적인 과정을 통해 매입한 토지이니 당연히 자신들의 소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뾰족한 첨탑을 세우는 것이 기본인 성당이니만큼, 가능한 한 장안에서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들의 접근성이 좋은 위치에 성당을 짓고 싶은 종교적·현실적인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명동성당보다 2년 늦게 완공된 성공회 강화성당(경기도 강화에 있는 성공회 최초의 성당)이 한옥의 기본구조에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절묘하게 섞어 지어진 것과는 달리, 명동성당을 세우려 했던 프랑스 성직자들은 100% 순수한 서양식으로 지을 것을 고집했다.
천주교인들이 수미일관 종현 마루에 성당을 짓겠다고 주장하던 당시, 조선 정부가 성당 건축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는 1888년 3월 5일 대외 업무를 관장하던 외부(外部)가 러시아 공사를 통해 다른 자리에 성당을 짓도록 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쁘랑 주교가 이를 거부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즉 쁘랑 주교 등 천주교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종현 마루에 성당을 짓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데 반해, 당시 조선 정부가 반대한 것은 ‘구릉 정상’에 성당을 건축하는 것이었지 아예 성당 건축을 막겠다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조선은 열강들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던 시절 아니던가. 당시 국내에서 천주교의 위상은 그리 높지도 또 안전하지도 않았지만 1890년 구정을 전후한 무렵 조선 정부가 토지문권을 성당 측에 돌려줌으로써 길었던 토지분쟁은 일단락됐다. 이에 따라 1892년 8월 5일 치러진 정초식 이후 약 6년만인 1898년 5월 29일, 드디어 종현 마루에 종탑 높이 46.7m의 100% 완전한 서양식으로 명동성당(해방 이전까지는 ‘종현성당’으로 불림)이 들어서게 됐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메카가 되다
명동성당이 특별한 상징성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고딕양식 건물이자 천주교의 총본산이기도 하겠지만, 질곡 많은 우리의 현대사의 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다.
실제로 유신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 명동성당은 한국 격동 현대사의 현장이었다. 이를 테면 1975년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에 이어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세웅 김승훈 신부 등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메카로 변한다.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가히 충격적인 반정부사건으로,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가 그랬던 것처럼 명동성당은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던 이들에게는 일종의 소도였고 안식처였다.
명동성당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간접적인 연관은 비단 정치적 주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과 1978년의 ‘동일방직 사건’ 등의 노동운동에도 ‘명동성당’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1979년의 ‘오원춘 납치 사건’에서 비롯된 농민운동과 김지하 등 양심수들을 옹호하는 인권운동 등에 명동성당이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숱한 반독재 민주화 집회가 열리는 등 명동성당은 명실 공히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됐다. 87년 6월 항쟁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이 그것. 즉 6월 10일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 규탄 범국민대회’에서 촉발된 명동성당사태는 시민과 학생 등 6백여 명의 집단 단식농성으로 이어졌고, 결국 6월 항쟁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민주화운동이 특히 격렬했던 그해 87년, 명동성당에서만 127차례 연인원 6만여 명이 집회를 갖는 대기록이 세워지기도 했다.
‘안중근, 그런 살인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는 없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추앙받는 명동성당. 그러나 세상 여느 존재가 그러하듯 명동성당 역시 어두운 과거를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해서는 ‘누구 하나 비판받지 않을 자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나마 균형 있는 명동성당 답사를 위해서라도 간단한 사실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1936년 4월 1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부활미사가 경성방송국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방송되는 등 일제와 한국 천주교의 밀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같은 달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교구장들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애국적 행위’이므로 신사참배를 허용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1937년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실시한 것 외에 황군 위문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또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조선군사령관대리와 정무총감대리, 중추원참의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백동·약현·영등포 성당 등 4개 성당 연합의 제2차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실시했는데, 이 미사는 경성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실황중계까지 되어 명동성당의 ‘명성’이 말 그대로 ‘전국화’ 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일제에 협력한 예가 적지 않지만, 40년대 들어 고위 성직자가 서양인에서 아예 일본인으로 바뀐 예에서 보듯 일제 강점기의 명동성당이 조선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역을 해야만 했던 상황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던 지위와 영향력, 한국인 성직자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님을 고려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임에는 분명하다.
명동성당으로 대표되는 한국 천주교는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즉 명동성당 신학교에 다니던 학생을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로 퇴학시키는가 하면, 독립운동가 안명근은 명동성당의 두 외국인 신부의 고발로 일제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물론 이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일화는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도 ‘그런 살인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는 없다’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안중근 의사에 대한 '복권'은 1979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미사가 열리면서야 가능했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의 명동성당과 천주교는 이른바 성속이원론·정교분리론을 내세우며 일제의 수탈로 고통 받는 민족을 등한시하며 전시총동원에 협력한 바 있다.
명동성당, 앞으로도 소도 역할을 할까?
가톨릭의 원산지라 할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성당이 지리적으로 열린 공간에 위치한다. 또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평지에 세워지기 때문에 성당 주변에는 으레 광장이 생기게 마련이고 주변에는 장이 서거나 각종 집회 등이 열려왔다. 지금이야 ‘피신처’ 혹은 ‘은신처’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열린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명동성당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데다 입구에서 진입로를 따라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주위에 비해 확연히 드러나는 장점은 있지만, 그만큼 공간적 제약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가톨릭회관과 명동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서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명동성당에 가려면 수직 높이 10m 이상의 언덕을 올라가야만 본당 앞에 설 수 있다. 그러나 명동성당은 이런 제약에도 불구, 70~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20세기형 소도로서 충실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서는 사람들 사이에 명동성당에 대해 아쉬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90년대 중반 이후 명동성당이 이른바 ‘변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95년 있었던 한국통신 노조의 천막농성에 대해 ‘성당의 허가 없는 시위나 농성은 허락할 수 없다’며 퇴거 요청을 했던 것이나, 지난 2002년 성모병원 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 어느 주요 성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지를 사유물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공권력에 호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토로한 대표적인 사례 등. 예전 민주화운동 시기 때와는 달리 명동성당이 단순히 미사와 신도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한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명동성당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접은 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농성 과정에서 성당 측에 재산상의 피해가 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소음 등으로 미사 진행에 방해를 받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농성자들 때문에 통행에 불편이 생기기도 할 것이고, 자칫 화재나 각종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십분 감안한다고 해도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명동성당의 분위기에, 잘한 판단이라기보다는 뭔가 허전한 구석이 남는다.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 성공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바탕이 마련됐고 무언가 정치·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명동성당이 아니라 여의도로 ‘직접’ 찾아가는 등, 그 동안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신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갈 곳은?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동성당, 정확히 말하면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나 수배중인 노동자들의 천막이 있었다. 비록 경사 심한 들머리에서의 천막농성이었지만, 그리고 명동성당 측으로부터 철거 요청을 수없이 받긴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 명동성당은 불안한 몸을 잠시 의탁할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어떠한 ‘장소’는 그냥 눈에 보이는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과 과거의 창고이며 문화적인 전통과 가치의 저장소다. 어떠한 기념할만한 건축물이나 공간에는 단순히 흘러간 역사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해왔고 함께 해갈 사람들의 희망과 꿈이 숨어있다. 그런데 명동성당은? 단지 ‘사적 제258호’라는 이름으로서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은 아닐진대, 연말연초의 명동성당은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 - www.finland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