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편으로, 이 문구는 나이가 가치중립적인,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오해를 주기 쉽다. 「춘향전」의 주인공들의 나이는 십대 중반이었다. 그들은 십대 중반에 이미 시민권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성적 주체였으며, 노동과 사랑·저항·고통의 수행과 같은 한 사회의 행위자(agents) 역할을 충실히 해나간다. 지금 십대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처럼 나이의 의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중세의 열 살과 자본주의 사회의 열 살은 전혀 다르다. 중세 시대 어린이가 노동력의 주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린이는 교육과 보살핌 대상으로 간주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모성’, ‘아동기’라는 규범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 시대에는 이런 개념조차 없었다. 인간의 나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적 제도의 산물이다.
노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구나 노인이 된다. 노인문제는 곧 당신의 문제다”라는 식의 언설도 비슷한 맥락에서 문제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대중적 호소력은 있겠지만, 연령주의를 역사적·정치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생물학적 문제로 보이게 하여, 연령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나이 듦이 적용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20대보다는 40대가 유리하다고 간주되지만, 여성 배우에게 나이 듦은 대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나이 듦이 생물학적인 문제라면, 모든 이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실현되는 ‘평등한’ 문제여야 한다. 나이는 개인의 성별과 계급에 따라 적용 방식이 정반대일 정도로, 다양하게 경험되는 정치적 제도다. 그러나 연령주의의 문제화를 회피하는 사회는, 나이 듦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질서”라는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나이 차별에 개입하지 않는다.
사회 조직 원리로서 나이
연령주의(ageism)는, 말 그대로 인간의 나이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서 연령주의는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작동한다. 첫째는, 젊은이 중심주의(거의 숭배에 가깝다)나 연장자주의처럼 나이가 적거나 많음이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경우다. 둘째는, 결혼·취업 적령기처럼 특정한 나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거나 나이가 들어서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식의 ‘생애 주기(life course)’ 언설에 의한 차별이다.
셋째는, 차별의 연령화(aged)다. 이는 서구는 남성으로, 아시아는 여성으로 재현되는 서구 중심주의의 성별화(性別化)의 원리와 비슷하다. 사회적 약자가 성별에서 약자인 여성의 이미지를 갖는 것처럼, 나이가 차별과 타자화의 은유가 되는 것이다. 실패·비참함·추함·경멸이 노망(老妄)· 노추(老醜) 등으로 비유되거나, 사회적 약자를 어린 사람 취급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경우나, 젊은 검사는 ‘영감’이라고 부르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나 장애인, 여성을 어린 사람 취급하는 것 등이 일상의 사례들이다.
사실, 계급 문제나 성차별도 연령주의가 없이는 작동하기 어렵다. 위의 세 가지 상황은 계급·외모·성별·장애·인종 등의 다른 사회적 억압들과 복잡하게 맞물려 있어서, 나이 문제는 가시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회조직과 인간관계는 성별과 나이를 기초로 조직돼 있다. 사람을 만나고 평가할 때 상대방의 성별과 나이를 모른다면, 우리는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직업, 지위, 외모, 언어, 태도, 습관, 문화적 취향, 성생활, 결혼 등 삶 전반에 걸쳐 특정한 나이에 맞는 정상성을 요구하고 요구받는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과 노인은 연령에 의한 타자(他者)들이다. 나이가 적으면 업신여겨지고, 나이가 많으면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연령주의는 성별, 인종 등과 달리 고정된 피해 집단이 없다는 특성 때문에 사회문제로 인식되기가 어렵다. 나이가 들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노인과 청소년은 모두 사회적 주체가 아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전후에 존재한다고 간주된다.
이러한 인식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제이자 기본 동력인 핵가족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거세 위협에 따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는 유명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핵가족을 옹호하는 핵심적 이론 체계이다. 청소년과 노인의 성 활동(섹슈얼리티)을 비정상화하거나 억압하는 것도 핵가족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성적 결합이 한 세대(30년)를 넘어서 진행되는 것(예를 들어 남자 청소년과 성인 여성 간의 성)은 남성 가장 중심의 핵가족 유지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젊은’ ‘중산층’ ‘비장애인’ ‘남성’의 삶
칸트의 자율적·합리적·이성적 인간 개념 역시 핵가족 제도로 인한 생애 주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세에는 아동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정당화하고, 여성을 산업예비군으로 집안에 묶어 두기 위해서는 아동기와 모성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아동기의 탄생은 이러한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발명된 것이다.
청소년기는 18세기 중엽 이후 서구에서 산업혁명과 대량 식량 재배에 의해 식량 사정의 호전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생애 주기 이데올로기는 17세기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자본주의는 가장 ‘생산적’인 인간으로 간주되는 ‘젊은’ ‘중산층’ ‘비장애인’ ‘남성’의 삶을, 인간 발달 모델로 상정해야 했다. 이것은 성취 중심의 삶으로, 공적 영역의 경력만이 자아를 구성하게 된다. 이력서에 쓸 수 없는 삶은 의미 없는 인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상 인간’ 경계 밖에 존재하는 여성·노인·장애인·어린이는 의존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이들의 삶은 주변화된다. 공적 영역에서의 은퇴가 쓸모없음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노년의 삶은 회고만 남은 잉여의 시간이 되어 버린다. 고령화 사회에서 여성 노인들은 ‘사적 영역’에서 육아, 가사노동과 같은 보살핌 노동을 계속 하고 있다. 노년기가 휴식기라는 인식은 여성 노인의 노동을 비가시화하고, 남성 노인은 할 일이 없고 소외로 괴롭다. 매력, 열정, 가능성, 순수, 치열함은 젊은이만의 가치로 간주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는 ‘철이 없거나 주책’이다. 사회의 주체, 즉 노동과 성과 사랑, 욕망의 주체는 젊은 남성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표준적 인간 범주에서 제외된 노인, 청소년, 장애인, 여성은 복지의 대상일 뿐이다.
한국사회는 정상성에 대한 강박이 특히 심한 사회이다. 나이에 맞는 지위를 갖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시선은 ‘패배자(loser)’ 그 자체다. 나이에 맞는 삶에 대한 문화적 규율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인생을 다르게 살 자유, 방황할 자유가 없고, 그것은 쉽게 낙오로 연결된다. 취업하는 데 나이제한이 당연한 규정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은 곧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미국에서는 1967년부터 연령차별금지법에 의해 구인 광고나 이력서에 나이를 명시하는 것은 불법행위로 본다). 어떤 면에서 한국사회는 계엄령이 필요 없는 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의 상상력, 용기, 소망은 나이에 따라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대단히 자발적으로 나이 듦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 - 누가 지배하는지 모르는 - 를 수용하고 있다. 일상의 아주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나이 듦에 대해 동일한 해석 틀을 가지고 있으며, 미세한 검열과 규율에 예속되어 있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된다?
이병주의 『지리산』이라는 소설에는, “서른 이전에 혁명가가 아닌 사람 없고, 서른 넘어 혁명가인 사람도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나이 들면 보수적이 된다는 이런 식의 언설은, 일상에서 대단히 흔하다. 얼마 전, ‘진보적인 논객’으로 이름난 어느 남성은 “60세 이상은 정치를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피’라는 표현도 연령 차별적인 언어다. 만일, 사람들이 나이 들어 보수적이 된다면, 그것은 나이 때문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구조화한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30대 중반의 나이를 가리켜 “오후 3시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 중 오후 3시는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는 늦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연령주의 사회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삶을 선택할 가능성이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방부나 법조계에서 자기보다 기수나 나이가 어린 사람이 승진하면 퇴직하는 관행에 대해 봉건적 권위주의라는 비판이 많지만, 사실 그러한 현상은 정도를 달리할 뿐 일반 회사나 학계, 종교계, 언론사, 사회운동 내부에도 만연해 있다.
자기 경험을 뛰어넘어 타인, 더구나 타자 억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특정 연령대에 ‘생산성 높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하다. 그들에게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 여성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대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사회가 바로, 특정한 인간의 삶의 조건이 과잉 보편화되어 모든 인간의 기준이 되는 전체주의 사회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그래서 차이는 언제나 특정한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정치적 해석이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려면, 나이가 아무런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아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시기마다 모든 시간의 가치는 균질해야 한다. 나이에 따라 인간의 권리가 다르지 않다면, 노후(老後)라는 말부터 없어져야 한다. 노전(老前) 생활이 따로 없듯이 노후 생활도 없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