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의 아들이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됐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양씨가 여호와의 증인 국제회의에서 아들 소식을 전하자, 미국의 한 신도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한국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 미국인은 의정부교도소에서 양씨의 아들을 면회하는 동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줄곧 울기만 하더니, 한국을 떠나면서 "올림픽을 유치한 OECD 국가에서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 때나 가능한 야만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국가인권위는 2002년 10월 양씨의 진정사건에 대해 "구금시설 내의 여호와의 증인 수용자에게 종교집회를 불허하는 것은 평등권 및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이므로, 여호와의 증인 수용자들도 종교집회를 열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법무부장관에 권고했다. 하지만 법무부는 3개월 뒤 "여호와의 증인 수용자는 종교 교리를 이유로 실정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형을 집행하는 중인데, 만약 종교집회를 허용한다면 실정법 위반 행위에 정당성을 강화해 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국가인권위 권고 수용불가를 통보해왔다.
이에 국가인권위는 법무부의 회신 내용을 검토한 뒤, 이례적으로 권고 수용 재고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법무부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3대 종교 이외의 종교를 신봉하는 소수의 수용자들에게도 종교집회를 허용하라"는 공문을 산하 교정기관에 발송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구금시설 종교집회 허용을 놓고 국가인권위와 법무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은 양씨에게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국가인권위가 생겼을 때 죽은 엄마를 다시 만난 것 같은 심정이었고, 진정서를 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일사천리로 풀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 본질의 문제도 아닌 구금시설 종교집회 허용 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자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물론 상처가 깊었던 만큼 극적인 변화의 물꼬는 그의 지친 심신에 한 가닥 위안을 주었다.
600여명의 대체복무자로 국가안보가 불안해진다?
이 무렵 양씨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제로 한 각종 토론회에 단골 패널로 참석해 현행 법률의 반인권적 성격을 비판했다. 그때마다 보수 진영의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징병제의 근간이 흔들릴 경우 안보에 심각한 위험이 초래된다는 엄포였다. 그때마다 양씨는 "해마다 600여명에 이르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감옥행을 자처한다. 과연 그들을 감옥에 보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안보가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채택하고 있는 수많은 선진국들의 안보는 매우 불안하다는 논리인가?"하고 반박했다.
양씨는 세상이 조금씩 앞으로 나간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군사정권 시대였다면 입에 담기도 어려웠던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 그러나 '이번에는…'하며 실낱 같은 기대를 품었던 재판과 소송의 결과가 기존의 판례를 쳇바퀴 돌리듯이 뒤따를 때마다 그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양씨는 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더 감옥에 가야 할 것인가를 헤아리며, 그 길이 비록 가시밭이라도 양심을 일신의 안락과 바꾸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면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이 언젠가는 진정한 평화와 구원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수많은 파렴치범을 사면·복권시키면서도 종교의 자유를 외친 사람에게는 가석방의 관용조차 베풀지 않고, 총을 들지 않는 대신 다른 일을 하면서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사람을 계속해서 감옥에 넣고 전과자로 만드는 것이 진정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여호와의 증인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종교적 신념을 지켜나갈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