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고목만이 서 있는 황량한 길가에 서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두 사람, 잘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예의 신분도 아닌 자유 시민으로 살아가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저들은 의미도 목적도 없는 끝없는 대화 속에서 파묻혀 있다. 저들의 삶 전체는 무의미한 대화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일체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도 없는 세계에서 의미도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이 두 사람.
그런데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는 이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많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단조롭고 지루하게 흘러가는 대화와 그 지루한 시간들. 단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베케트의 희극 속에서 그건 두 주인공의 전 삶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삶의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오늘 나의 시간도 그렇게 지루하게 흘러가는 단편들일까?
공간의 제약을 탈피하고자 했던 베케트의 의도 속에서 나는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속박된 공간 속에 갇혀 답답함을 느꼈다. 황량한 길가가 마치 2인실의 대기실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곳에 고목 한 그루마저 설정되지 않았더라면 그곳은 마치 저승의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설마 베케트는 갈 곳도 없고 그저 그곳에서만 존재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삶의 전 공간을 표현하고자 했을까?
다행히도 베케트는 기다림이란 의외의 목적을 무의미한 현실 속에 대비하고 있다. '고도를 기다림', 그렇다. 블라디미르의 고도에 대한 기다림은 바로 이 작품 전체가 가지는 유일한 의미일 것이다. 그건 어쩌면 시간 속의 의미이다. 인간 존재 전체의 시간 속에서 가지는 유일한 의미는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무엇에 대한 기다림인가'에까지 질문이 던져졌을 때 그에 대한 답은 막연한 것이리라.
'고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주인공들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오기로 했고, 그래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자칫 저들의 정신착란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기도 할 때마다 등장하는 한 소년의 존재 속에서 저들의 기다림이 정신착란이 아닌 현실적 상황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아마도 베케트는 종교에서의 선지자를 소년에게 대입시키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지자의 출현도 '기다림'의 실체를 분명하게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실패하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이런 사상은 아마도 20세기 실존주의의 영향 속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베케트의 의도이리라.
작품의 전체 내용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목적 요소인 '기다림' 외에 나는 또 하나의 공간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황량한 길 가에 서 있는 한 그루 '고목나무'다. 고목나무를 통해 드러나는 의미와 목적, 그것 역시 '고도를 기다림'이라는 막연한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나무 앞으로 오겠다는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 저들은 나무 앞에서 매일 그렇게 고도를 기다린다. 어떤 나무인지, 어디에 있는 나무인지는 중요치 않은 듯하다. 유일한 공간적 의미는 나무 앞이다. 무대에 설치되어 있는 바로 그 고목나무 앞?
사람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의 사물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내 집, 내 마을, 내 마을의 앞 산, 동네 중간에 서 있는 고목, 내가 놀던 시냇가, 인간의 원시적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공간적 개념은 없다. 그것 오로지 자신이 서 있는 그 장소, 거기에 있는 나무만이 유일의 의미이다. 고도가 온다면 바로 자신의 의식 속의 유일한 그곳으로 와야 한다. 바로 그것이 무대 위의 고목나무이다. 따라서 유일한 공간적 소품 속에 기다림의 전체 의미가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시간적 공간적 의미 역시 베케트의 언어적 유희일 뿐이다. 의미와 목적만 있을 뿐 그 구체적 대상은 없는 것이다. 즉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기다림'이란 없었다. '고도'는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 놓은 기다림의 대상일 뿐이다. 유토피아와 같은 관념 속의 실체일 뿐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의식으로 만들어 놓고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향일 뿐이다.
토머스 모어가 현실 정치를 바탕으로 한 '유토피아'를 꿈꾼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비현실적 상황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기다림의 대상인 '고도'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베케트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의미도 목적도 없는 무력한 인간의 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 의도만으로 이 작품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은 많은 독자들에게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게 하는 다양성이 표현되어져 있다. 아니 전체적 단조로움 속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애써 어떤 의미를 찾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 같이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간적 공간적 의미를 애써 찾아내고자 하는 시도가 계속되는지도 모른다.
책의 줄거리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다음의 에스트라공의 대사가 그것이 될 수 있으리라.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떠나지 않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이건 진저리가 난다.'
절망과 불안 속에서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의 도래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기독교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철저하게 인간의 '부조리함'을 피력하는 실존주의적 철학 사조를 드러내는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바벨'이다. 혼돈인 것이다.
가장 단조로운 연극으로 엄청난 사상의 혼돈을 초래케 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베케트는 그리스도인의 재림신앙을 꼬집고 있는 것 같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행위가 마치 의미도 목적도 없는 막연한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베케트 자신이 사상적 혼란 속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는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을 인간의 유일한 의미 있는 행위로 묘사하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적 행위 속에서 인간의 무력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묻고 싶다.
작품을 읽으면서 한 가지 얻은 소득이 있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보았다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다림인가? 무엇에 대한 기다림인가? '고도'라는 유토피아적 사유의 결과인가? 아니면 그 너머의 구체적인 실체인가? 인간은 기다림의 존재이다. 관념 속의 기다림이 아닌 실존 속의 기다림으로 표현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결국 인간은 실존하는 존재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만 그 참된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의미는 실존하는 기다림이라고 감히 정리한다. 이것이 바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내게 준 결론이다.
덧붙이는 글 | 사무엘 베케트 / 고도를 기다리며 / 청목사 / 1999